노-플랫포밍이 때때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 – Neil Levy

노-플랫포밍(no-platforming)에 대한 논의는 종종 언론의 자유(free speech) 지지자들, 즉 나쁜 발언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은 더 많은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발언이 해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으로 제시됩니다. 저는 논쟁의 구도를 이렇게 잡는 것은 절반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발언(open speech)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플랫폼 자체가 증거를 제공하는 방식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노-플랫포밍은 어떤 사람의 믿음이 위험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공적인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정책이나 시위를 통해 막는 것을 말합니다. 열린 발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일차 증거(first-order evidence), 즉 발언자의 논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차 증거(higher-order evidence)를 간과합니다.

고차 증거는 믿음이 형성된 방식과 관련된 증거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차 증거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조절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당장 라스베가스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것을 지지하는 논증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지만, 당신이 지금 매우 취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주저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했다는 사실은 일차 증거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고차 증거입니다. 어쩌면 아침이 되면 라스베가스에 가려고 했던 이유가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차 증거는 현대 인식론에서 ‘의견 불일치의 인식적 중요성’이라는 제목 아래 많은 논의의 초점이 되어 왔습니다. 익숙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친구와 식사 비용을 반씩 나눠 내기로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사람은 각자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사용하여 둘이 먹은 모든 음식의 가격을 더한 다음, 그 총액을 2로 나눕니다(계산서가 도착하는 데에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립니다). 당신은 각자 34파운드씩을 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친구는 36파운드씩 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암산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경우 관련된 모든 일차 증거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답에 대한 확신의 정도를 줄여야 합니다. 친구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는 계산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둘 중 적어도 한 명은 실수를 한 것이고, 당신이 아닌 친구가 실수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낮춰야 합니다.

대학교나 유명한 행사에서 강연을 하거나 신문에 칼럼을 쓴다는 것은 (초견적)(初見的, prima facie) 고차 증거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뢰할 만한 연사라는, 혹은 존중받을 만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전문성을 인증하는 것인데, 전문성은 그 사람의 의견에 특별한 가중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고차 증거입니다(위의 식당 계산서 예시에서처럼 의견 불일치가 발생한 상황에서, 관련된 수학이 어렵고, 의견 불일치가 당신과 수학 박사 학위 소지자인 친구 사이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분명 당신은 당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이 친구가 실수했을 가능성보다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해야 하며, 친구의 의견에 따라야 합니다).

인식론자들은 우리가 때때로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상대방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능력이 없거나 농담을 하고 있거나 나를 놀리고 있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연 초청은 수많은 가능한 연사들 중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사람으로 누군가를 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사에게 신뢰성을 부여합니다. 신뢰할 만한 자리에서 강연하도록 초청받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유능하고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는 가중치가 높은 고차 증거를 제공합니다. 신뢰도는 선정되었다는 사실 자체와 강연 장소의 명성에서 비롯됩니다. 스스로 선정하는 것은 전혀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하이드 파크(Hyde Park) 한쪽 구석의 연설대에 올라간다면, 저는 스스로를 선정한 것이고, 저에게는 어떤 특별한 신뢰성도 부여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런 종류의 장소에서 연설하면 부정적인 고차 증거가 부여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괴짜라고 생각하고 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초청이 부여하는 고차 증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장소의 명성—TED 강연에 초청되었다는 것은 그 기관이 매우 명성이 높은 기관이기 때문에 상당한 신뢰성을 부여합니다—과 선정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사실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면 치근관 치료가 암을 유발한다는 신빙성 없는 견해를 퍼뜨리는 다큐멘터리 Root Cause (2019)에 대한 논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와 아마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워싱턴 주립대학교(Washington State University)의 미디어 학자 에리카 오스틴(Erica Austin)은 최근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사용자가 콘텐츠를 제작하는 유튜브(YouTube)와 달리, 이러한 사이트에서 제공된다는 것 자체가 다큐멘터리에 대한 신뢰성을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유튜브에 올리는 것은 마치 제가 스스로 연설대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를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신뢰성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나 아마존에 선정되면 어느 정도 신뢰성이 부여됩니다. 물론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그리 까다롭게 선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부여되는 신뢰성은 꽤 제한적입니다. 대학에서 강연하도록 초대를 받으면 훨씬 더 많은 신뢰성이 부여됩니다.

고차 증거는 진정한 증거입니다. 고차 증거에 대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완화하고 때로는 (예를 들어 나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아예 믿음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입니다. 따라서 노-플랫포밍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인식론적 이유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쁜 논증이나 그릇된 논증을 하는 누군가를 초청하는 것은 오도하는 증거를 생성하는 것이고, 우리는 오도하는 증거를 생성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가 잘못임을 알고 있는 견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 견해를 지지하는 고차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노-플랫포밍을 할 근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차 증거는 논박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점입니다. 만약 저의 대학이 기후변화 회의론자에게 플랫폼을 제공한다면, 이는 그 사람의 견해를 지지하는 고차 증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 고차 증거는 대학이 나중에 다른 연사를 초청해 ‘균형’을 맞추거나 그 연사가 청중으로부터 혹독한 반응을 받는다고 해도 논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연사의 주장은 논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이 자신의 전문성을 인증한다는 그의 주장은 논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초청은 단지 초견적(初見的, prima facie) 고차 증거일 뿐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학교에 큰 기부를 했다거나 학장의 사촌이라는 이유만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증거는 상당히 약화됩니다. 고차 증거를 반박하는 것은 이성적 논증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고려사항입니다. 고차 증거를 반박하는 우리의 방식은 많은 열린 발언 논증에서 비난받는데, 이는 일차 증거(first-order evidence)를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인 공격(ad hominen attack)(“그는 석유 산업계로부터 자금을 받았다.” 또는,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이나 플랫폼을 제공한 사람들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것은 그의 논증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종종 고차 증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일 수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논증과 토론을 통해 생산되며, 좋은 사회는 반대 의견의 표현을 허용합니다. 발언을 억압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나 플랫폼의 제공이 특정 견해에 유리한 고차 증거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이 논쟁의 양측에 인식론적(epistemic) 고려사항이 있다는 것을 수반합니다. 특정 연사가 옹호하는 입장이 잘못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우리는 노-플랫포밍을 지지할 인식론적 이유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그에게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논박하기 매우 어려운(그리고 논증으로 논박될 수 없는) 증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적어도 이러한 고려사항이 누군가에 대한 플랫폼 제공 거부를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닐 레비(Neil Levy)는 옥스퍼드 우에히로 실천윤리센터(the Oxford Uehiro Centre for Practical Ethics)의 선임 연구원이자 시드니 맥쿼리 대학교(Macquarie University) 철학과 교수입니다. 저서로는 『의식과 도덕적 책임』(Consciousness and Moral Responsibility, 2014)이 있습니다. 그는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https://www.practicalethics.ox.ac.uk/people/professor-neil-levy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Why no-platforming is sometimes a justifiable position을 번역한 것입니다.
Aeon의 번역 및 배포 기준을 준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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