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계관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믿음 중 많은 것들은 대체로 우리가 깊게 몸담아 온 공동체의 결과물입니다. 종교적인 부모는 종교적인 자녀를 낳는 경향이 있고, 진보적인 교육 기관은 진보적인 졸업생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으며, 파란색 주는 대부분 파란색을, 빨간색 주는 대부분 빨간색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탁월한 지성으로 잘못된 추론을 꿰뚫어 보고 편견을 알아차리며, 그 결과 사람들 대부분을 믿음으로 이끄는 사회적 영향에 저항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 믿음이 이런 종류의 영향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되는 것은 저를 조금 불편하게 합니다.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자랐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저는 만약 제가 종교적인 공동체에서 자랐다면 신을 믿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만약 제가 유신론자로 자랐다면,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생각들에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역사를 배웠을 것이고, 신의 존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논증을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자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접했을 것입니다. 차이점은 제가 이 증거를 다르게 해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의 차이는 사람들이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와 반대하는 증거를 다른 방식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자료를 모으고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상황이 그렇게 단순했다면 수 세기에 걸친 종교적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고려 사항들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자라온 사회적 환경의 산물일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는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는 도전은 우리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게 만들고, 확신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버리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도전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내가 특정 공동체에서 성장한 결과 특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한 뻔한 심리적 사실일 뿐, 그 자체로 신의 존재와 같은 거창한 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는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이러한 심리적 사실 자체가 우리의 세계관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가 아니라면, 왜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그러한 문제에 대한 확신을 줄이도록 동기를 부여할까요?
사회적 환경이 믿으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든 믿는 방법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믿음에 대한 사회적 영향에 대해 알게 되면, 내가 신뢰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내 믿음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내 온도계가 신뢰할 수 없는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수치를 표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온도계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믿음들이 신뢰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믿음들도 더이상 신뢰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위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저는 정말로 저의 믿음이 신뢰할 수 없는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판단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신론적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속한 이 특별한 공동체에서 성장한 결과이지, 이런저런 아무 공동체에서나 성장한 결과는 아니다.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공동체가 많다고 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도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내 믿음이 신뢰할 수 없는 방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부정한다. 다행히도 나의 믿음들은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형성되었다. 그것들은 합리적인 세계관을 가진 지적이고 정보가 풍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온도계 비유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공동체에서 자랐다면 다른 믿음을 가졌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온도계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내 온도계가 신뢰할 수 없는 온도계를 많이 취급하는 상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매장에서 신뢰할 수 없는 온도계를 판매한다는 사실이 제가 가진 특정 온도계의 수치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운 좋게도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온도계 중 하나를 샀다고 생각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반응에는 뭔가 수상쩍은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거짓을 믿는 공동체에서 자랐더라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신론자라면 ‘다행히도 나는 교육을 잘 받고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구시대적인 종교적 교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 밑에서 자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신론자였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고 믿는 오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현실에 대한 완전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반응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이라는 사실은 그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 믿음의 경우에는 ‘나는 운이 좋았다’는 반응이 분명 수상해 보이지만, 이런 반응이 완전히 합리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온도계의 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온도계를 찾을 때 온도계의 종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여 진열대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골랐다고 가정해 봅시다. 매장에서 신뢰할 수 없는 온도계를 많이 취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걱정이 되어 진지하게 조사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구입한 특정 온도계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온도계를 생산하는, 평판이 좋은 회사의 온도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경우 ‘이 훌륭한 온도계를 구입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구입한 온도계에 대해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내가 자란 공동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자란 공동체가 믿을 만한 곳이라는 믿음 자체가 그 공동체에서 성장한 결과인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에게 심어준 믿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 형성 방법의 신뢰성을 평가하려고 할 때, 바로 그 방법의 결과물인 믿음을 그 방법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은 믿음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이 형성된 방식에 대한 우려 때문에 하나의 믿음 또는 일련의 믿음들을 유지할지 포기할지 숙고하는 것은 해당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관점에서 수행되어야 합니다. 요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어떤 믿음에 대해 우려하고 있고 그것을 포기할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할 때 우리는 [의심의 대상이 되는] 믿음이나 믿음 군을 제쳐두고, 그에 의존하지 않는 관점에서 해당 믿음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때로는 의심의 대상이 된 믿음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믿음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려스러운 점은 믿음을 의심으로부터 회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많은 것들을 이 경우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들을 뒷받침하는 통상적인 논증들을 사용할 수 없는데, 의심의 관점에서는 바로 그 논증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한 논증이 반대 입장에 대한 논증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바로 그 사회적 영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또한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그 믿음이 진리라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특정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서 자랐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염려는 믿음을 유지할지 여부를 의심의 관점에서 숙고하는 경우에만 우려할 만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특정 믿음이 생겨난 방식에 대한 사실은 그 자체로는 특정 종교적, 도덕적 또는 정치적 관점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따라서 평소 사용하는 모든 추론과 논증을 기꺼이 사용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믿음을 포기할지 여부를 생각한다면, 당신은 단순히 당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특정 온도계를 구입했거나, 기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 열차에 타게 되었거나, 인생의 연인이 될 사람과 비행기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 것처럼 말이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로 운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의심의 관점에서 보면, 운이 좋았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자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저자 소개
미리엄 쇤필드(Miriam Schoenfield)는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의 철학과 부교수입니다. https://www.miriamschoenfield.com/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Why do you believe what you do? Run some diagnostics on it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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