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 – Sylwia Wilczewska

종교철학의 주요 논쟁 중 하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신론자(theist)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무신론자(atheist) 사이의 논쟁이다.[1]

그러나 신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유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인 것은 아니다. 1860년대에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가 만든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용어는 이 두 진영에 속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를 가리킨다.


1. 불가지론이란 무엇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유보(suspend)할 때, 즉 해당 문제를 고려한 후 중립적(neutral)인 태도를 취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않을(undecided) 때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된다. 예를 들어, 근처에 있는 나무의 나뭇잎의 수가 홀수인지 짝수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자가 된다.[2]

현대 종교 철학에서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2. 불가지론이 아닌 것

불가지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피하려면, 다음 사항들에 유의해야 한다:

  • 불가지론이 반드시 종교적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불가지론자는 비-믿음적 신앙(non-doxastic faith), 즉 유신론적 믿음 없이 다른 긍정적 태도(예: 희망)를 핵심으로 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3] 불가지론자의 또 다른 긍정적 선택지는 허구주의(fictionalism)를 수용하고 종교를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허구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4] 그러나 불가지론은 종교에 대한 구체적인 긍정적 또는 부정적 태도를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 불가지론자는 신의 존재에 관한 증거를 얻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희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불가지론은 ‘구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영적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5]
  • 불가지론은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부정신학(apophaticism)이 아니다. 대부분의 설명에서 부정신학은 유신론의 하위 그룹이다.
  • 불가지론은 종교에 대한 비인지주의(religious non-cognitivism)가 아니다. 종교에 대한 비인지주의는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신’이라는 용어나 다른 종교적 용어가 포함된 모든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으며 (가령,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의미 있는 답을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불가지론자와 비인지주의자 모두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는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그에 대한 정답은 있다고 믿는다.

3. 불가지론을 받아들일 이유(Why agnosticism?)

불가지론을 지지하는 주요 논증은 증거 논증(the evidential argument)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전제 중 하나는 증거주의(evidentialism)라고 불리는 견해로, 증거가 무언가를 지지하면 그것을 믿어야 하고, 증거가 그것의 부정을 지지하면 그것을 믿지 않아야 하며, 증거가 중립적이면 그 문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전제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증거가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중립적이라는 것으로, 앞의 전제와 함께 불가지론적 결론을 끌어낸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유신론과 무신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여기에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증거가 없다는 견해도 포함된다). 다른 이들은 증거가 애매하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즉 양측에 얼마나 많은 증거가 있는지, 또한 그것을 어떻게 비교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신론을 지지하는 악의 존재 문제를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존재론적 논증과 어떻게 비교하여 평가할지를 말하기는 어렵다.[6]


4. 불가지론을 거부할 이유(Why not agnosticism?)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지지하는 모든 논증은 그 자체로 불가지론에 반대하는 논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증거 논증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려는 시도도 있다.

불가지론을 지지하는 증거 논증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또는 심리적 또는 실질적 측면에서 무신론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신론자인지 아닌지가 우리의 행동과 태도(예: 내세에 대한 기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떤 행동을 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만 있을 뿐 그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7]

증거 논증에 대한 또 다른 흔한 대답은, 증거가 애매한 수많은 사안들이 있으며, 그것들에 대한 판단을 모두 유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합리한(unreasonable)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특히 윤리나 정치와 같이 많은 것들이 걸려 있는 영역에서 우리는 종종 증거가 다른 해석을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믿음이 이성적으로(rationally)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반직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중립적이거나 애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유신론적 또는 무신론적 믿음은 왜 그렇지 않은지 설명해야 하는 부담은 불가지론자에게 있다.[8]


5. 약한 불가지론과 강한 불가지론

불가지론은 강한 불가지론과 약한 불가지론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 왔다. 이들의 차이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제안된 한 가지 구분 기준은 불가지론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요구되는지 여부이다. 약한 불가지론자들은 (현재 자신들을 포함하여)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허용된다고 믿는다. 강한 불가지론자들은 모든 사람이 이성적으로 남아 있으려면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만약 어떤 사람들이 때때로 중립적이거나 애매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약한 불가지론이 바람직하며, 만약 모든 사람이 항상 중립적이거나 애매한 증거만을 가질 수 있다면, 강한 불가지론이 올바른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약한 불가지론자들은 증거에 의해 정당화된 유신론적 혹은 무신론적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반면, 강한 불가지론자는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본다.[9]


6. 불가지론의 미래

불가지론은 종종 ‘공허한’ 입장, 즉 어떤 입장을 취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불가지론의 적극적인(positive) 측면, 즉 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관점의 가능성과 본질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변치 않는(permanent) 불가지론이 어떤 형태의 종교적 헌신 또는 그것의 부재와 결합된 결과를 탐구하는 반면, 다른 철학자들은 불가지론의 본질을 보다 확고한 (유신론적 또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로 분석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불가지론은 유신론적 영역과 무신론적 영역 사이에 놓여 있는 인식적, 영적 중간 지대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주석

[1] 무신론에 대한 다른 정의에 따르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소극적 무신론자(negative) 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적극적 무신론자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불가지론자는 소극적 무신론자의 일부가 된다. 예를 들어 Martin 2007: 1-3 및 Draper 2017 참조.

[2] 판단 유보(suspension)와 미결정(indecision)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Friedman 2013: 166-167을 참조.

[3] 비-믿음적 신앙의 본질과 불가지론과의 관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열린 태도는 종종 불가지론자에게 그러한 신앙을 가능하게 만드는 희망이나 이와 유사한 긍정적 태도의 근거로 여겨진다.

[4] 무신론자가 허구주의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지만, 허구주의는 불가지론자에게 특히 적합한 태도라고 오랫동안 주장되어 왔다. 불가지론과 허구주의를 결합하려는 최근의 제안은 Le Poidevin 2020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불가지론을 영적 탐구와 연결시키는 입장의 예로는 Draper 2002 참조.

[6] 양측의 증거가 동등하다는 관점에서의 불가지론에 대한 정의는 예를 들어 Martin 2007: 3을 참조. 증거 평가가 어렵다는 관점에서의 정의는 Le Poidevin 2010: 54-57 및 Oppy 2018: 50-63 참조. 인식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에서 증거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Todd R. Long의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참조.

[7] 이 대답의 고전적인 버전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그의 고전 “믿으려는 의지”(James 1896/1979)에서 제시했다. 이 대답은 증거주의자(evidentialists)와 실용주의자(pragmatists) 사이의 논쟁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이것이 불가지론에 대해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8] 예를 들어, Van Inwagen 1996.

[9] 더 자세한 내용은 Oppy 1994: 147-148 및 2018: 18-19 참조. 또한 Kenny 1983: 87-88 및 Le Poidevin 2010: 9-10도 참조.


참고 문헌

Draper, Paul (2017), “Atheism and Agnosticism”. I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raper, Paul. (2002). “Seeking But Not Believing: Confessions of a Practicing Agnostic”. In Divine Hiddenness: New Essays (eds. Daniel Howard-Snyder, Paul K. Moser, pp. 197-214).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Friedman, Jane. (2013). “Suspended Judgment”. Philosophical Studies, 162(2), 165-181.

Huxley, Thomas Henry. (1896). “Agnosticism”. Science and Christian Tradition (pp. 209-240).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James, William. (1896/1979). “The Will to Believe”. In The Will to Believe (eds. Frederick Burkhardt, Fredson Bowers, Ignas K. Skrupskelis, pp. 2-32).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 번역본 1: 윌리엄 제임스, 박윤정 역, 「믿으려는 의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오엘북스, 2022.
– 번역본 2: 윌리엄 제임스, 정해창 역, 「믿으려는 의지」, 『실용주의』, 아카넷, 2008.

Kenny, Anthony. (1983). Faith and Reas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Le Poidevin, Robin. (2010). Agnosti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Le Poidevin, Robin. (2020). “The New Agnosticism”. In Agnosticism. Explorations in Philosophy and Religious Thought (eds. Francis Fallon, Gavin Hyman, pp. 29-46).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Martin, Michael. (2007). “General Introduction”.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theism (ed. Michael Martin, pp. 1-7)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Oppy, Graham. (1994). “Weak Agnosticism Defended”. International Journal for Philosophy of Religion, 36(3), 147-167.

Oppy, Graham. (2018). Atheism and Agnostic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Van Inwagen, Peter. (1996). “It Is Wrong, Everywhere, Always, for Anyone, to Believe Anything upon Insufficient Evidence”. In Faith, Freedom and Rationality (eds. Jeff Jordan, Daniel Howard-Snyder, pp. 137-154). Maryland: Rowman and Littlefield.


더 읽을 것들

Wilczewska, Sylwia (2020). “Agnosticism I: Language, Perspectives and Evidence”. Philosophy Compass 15(6).

Wilczewska, Sylwia (2020). “Agnosticism II: Actions and Attitudes”. Philosophy Compass 15(5).


관련 에세이

The Concept of God: Divine Attributes by Bailie Peterson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by Thomas Metcalf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by Todd R. Long

Is it Wrong to Believe Without Sufficient Evidence? W.K. Clifford’s “The Ethics of Belief” by Spencer Case (번역본: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것은 잘못인가? W.K. 클리포드의 “믿음의 윤리학”)

The Epistemology of Disagreement by Jonathan Matheson (번역본: 의견 불일치의 인식론)

Possibility and Necessity: An Introduction to Modality by Andre Leo Rusavuk

Hope by Michael Milona & Katie Stockdale

Pascal’s Wager: A Pragmatic Argument for Belief in God by Liz Jackson


저자 소개

실비아 빌체프스카(Sylwia Wilczewska)는 폴란드 과학아카데미(the Polish Academy of Sciences)의 철학 및 사회학 연구소(the Institute of Philosophy and Sociology) 외래교수이며 루블린 가톨릭대학교(the Catholic University of Lublin) 철학부의 연구 조교입니다. 현재 그녀의 철학적 관심사의 초점은 종교 인식론과 철학과 문학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에 있습니다. https://pan-pl.academia.edu/SylwiaWilczewska


이 글은 Sylwia Wilczewska의 Agnosticism about God’s Existence를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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