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활동가들이 소위 ‘노 플랫폼’(No-Platform) 논증을 사용하여 그들이 모욕적(offensive)이라고 느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공개 발언 금지를 주장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실제로, 이는 일반적으로 ‘모욕적인’(offensive) 인사들의 초청을 취소하도록 대학 당국에 항의하거나 시위를 벌이는 것을 포함한다. 대서양 양쪽에 많은 사례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노-플랫포밍을 통해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아얀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 등의 초청을 취소시켰으며 영국에서는 마리암 나마지(Maryam Namazie)와 저메인 그리어(Germaine Greer) 등이 노-플랫포밍의 대상이 되었다.
때때로 노-플랫포밍은 특정 주제에 대한 발언을 침묵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옥스포드에서 낙태를 주제로 한 학생 토론이 취소된 것이 그 예이다. 지난 1년 동안 있었던 이러한 모든 사례들에서 노-플랫포밍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거의 동일하다. 해당 인물이 발언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개인, 집단, 심지어 사회 전체에 어떤 종류의 ‘피해’를 초래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해’란 물리적 피해라기보다는 심리적, 정서적, 또는 사회적 피해를 말한다. 실제로 노-플랫포밍은 주로 기존 사회 질서에 의해 위협받거나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소수자 집단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체성 정치 운동가들의 도구이다. 본질적으로 노-플랫포밍의 목표는 권력 관계의 평등화를 통해 더 큰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특정 맥락에서 발언을 선제적으로 검열하는 것이다.
노-플랫포밍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지지자들로부터 무자비한 비판의 대상이 되며, 발언으로 인해 초래될 실질적인 피해와 고통, 특히 소외된 집단이 받게 될 피해와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이러한 오해와 비난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입장을 분명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표현의 자유(free speech)에 대해 ‘무엇이든 괜찮다’(anything goes)는 식의 접근 방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은 아동 포르노, 위증, 강요 등을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나는 발언이 실질적인 피해를 초래할 수 있으며, 드물게 발생하는 그런 경우에는 발언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때로는 노-플랫포밍이 그러한 피해를 미리 방지하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예를 들어, 폭력을 선동하거나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그렇다. 그러나 나는 발언 제한을 정당화할 수 있는 피해의 성격과 그러한 피해를 발견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현대의 노-플랫포밍 지지자들은 그들의 실천을 정당화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설득력 있고 엄격한 정의를 제공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모욕적인(offensive) 발언이 그 발언 대상의 ‘인격'(personhood)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이 훼손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인격’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노-플랫포밍의 지적 토대는 매우 불안정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플랫포밍에 대한 정당화는 진정한 피해의 사례와 사소한 불쾌감 혹은 불편함의 사례를 구분하지 못한다. 둘째, 이러한 구분에 실패함으로써 노-플랫포밍은 사회 정의의 진보를 방해한다.
1970년대에 노-플랫폼 원칙이 등장했을 때, 노-플랫포밍은 인종 차별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발언으로 명확히 제한되었으며, ‘피해’는 인종 혐오나 폭력을 선동하는 것으로 분명히 정의되었다. 오늘날 노-플랫폼 운동의 문제는 ‘피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정밀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신 노-플랫포밍 옹호자들은 불편함이나, 위협, 불안전함, 모욕감 같은 것을 느낀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불만들은 예컨대 폭력 선동과 같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피해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순전히 주관적인 경험에 대한 주장이다.
이 전제는 현대 정체성 정치의 중심에 있다. 이 논증은 주관적 경험이 정의상 배타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주관적 경험은 해당 정체성 특성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됨의 주관적 경험은 어떤 남성도 알 수 없고, 흑인됨의 주관적 경험은 어떤 백인도 알 수 없으며, 트랜스젠더로서의 경험은 시스로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특정 정체성 집단이 주장하는 주관적 피해는 다른 어떤 집단에 의해서도 의문시될 수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한 구성원이 어떤 발언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다면, 그 자체로 그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주관적 경험에 대한 모든 주장은 동등하게 정당한(valid)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입장이 얼마나 악용되기 좋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특정 집단의 주관적 경험만을 근거로 노-플랫포밍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사소한 문제 제기들—즉 사소한 불쾌감이나 단순한 의견 불일치에 불과하지만 모욕감이나 피해라는 언어로 포장된 사안들—이 기각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으므로, 노-플랫폼밍의 요구들 사이에서 판단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가 실제로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려면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법학 교수인 유진 볼로크(Eugene Volokh)가 ‘검열에 대한 질투'(censorship envy)라고 부르는 현상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특정 정체성 집단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피해를 근거로 일부 발언에 대해 제기한 최초의 검열 요구는 다른 정체성 집단의 유사한 요구를 촉발한다. 노-플랫포밍은 전염성이 있다.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일단 피해 주장을 근거로 일부 발언을 금지하고 나면, 그와 같은 근거로 이루어진 다른 요구를 정당하게 거부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을 알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모든 피해 주장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어느 시점에는 이러한 주장들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영국 작가 줄리 빈델(Julie Bindel)을 둘러싼 지속적인 논란은 이 문제를 잘 보여준다. 빈델은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trans-exclusionary feminist)인데, 트랜스포비아라는 비난을 받으며 이를 이유로 영국 전국학생연합(NUS)으로부터 노-플랫포밍을 당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여성됨이 생물학적 여성임에 달려 있다는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의 동등하게 정당한(valid) 주장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 페미니스트들도 마찬가지로 트랜스 포용적 관점에 대한 노-플랫폼 요구를 정당화할수 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논리적 귀결은 정체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한 철저한 침묵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집단들의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이 가능한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동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노-플랫포밍이 사회의 이익을 한 집단의 주관적 이익에 강제로 종속시키고, 그러한 종속이 실제로 정당한지 판단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 한, 노-플랫포밍은 근본적으로 사회 정의와 배치된다. 그것이 도덕적인 검열의 한 형태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연막에 불과하다. 노-플랫폼 원칙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발언 제한을 정당화하는 피해의 종류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의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교육과 민주주의에 있어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피해 인식에 기반한 행동주의(activism)의 이름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2016년 1월 14일
저자 소개
모니카 릭터(Monica Richter)는 옥스퍼드 대학교(University of Oxford) 세인트 안토니 칼리지(St Antony’s College)에서 유럽 정치와 사회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2016년 당시 프로필)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Only the most noxious of speakers should be banned on campus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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