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윤리학: 잘못 믿는 것은 트럼프 지지자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 Nathan Nobis

트럼프 대통령 재임기의 혼란이 진정되어 가는 지금, 우리는 그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적절한 증거 없이 믿는 것.

지난 4년간의 많은 측면이 이러한 문제를 드러냈지만, 우리는 트럼프가 선거 결과를 거듭 부정하는 모습에서 이를 가장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부정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전례 없는 폭동과 국회의사당 공격으로 극에 달했습니다.

처음부터 헤드라인들은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그리고 “신뢰할 만하거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폭동이 한창 진행 중일 때 트럼프가 트윗으로 “신성한 압도적 선거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하자, TV 뉴스 앵커들은 일제히 “다시 말하지만, 증거는 없다!”라고 반박했습니다.

트럼프가 아무 증거도 없이 주장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가 오랫동안 증거에 반하여 거짓된 주장들은 해온 것은 잘 기록되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증거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주 증거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입니다.

증거는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과 관련된 정보입니다. 증거가 없으면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증거는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그것을 “증명”이라고 부르고, 어떤 증거는 약해서 단지 믿음이 참일 수도 있음을 시사할 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경험과 반성에서 비롯된 증거도 있지만, 많은 증거는 다른 사람들의 말, 즉 증언과 그들의 말이 참이라고 믿는 우리의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모든 유형의 증거에는 그에 적용되는 윤리학이 있습니다. 윤리적(또는 비윤리적) 행동이라는 개념은 잘 알려져 있지만, “믿음의 윤리학“도 있습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믿음을 형성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점에서 이러한 윤리는 증거에 의해 결정됩니다.

믿음의 윤리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생각만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장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부족하다면 그 주장을 믿어선 안 됩니다. 그 주장을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증거에 반하여 믿는 것, 즉 어떤 주장이 거짓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을 믿는 것은 더 심각한 잘못입니다.

믿음의 윤리학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회의사당 폭동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믿음에는 결과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동 방식을 결정합니다. 증거에 반하는 믿음은 나쁜 결과—해로움, 손상, 존중 결여—를 낳는 경향이 있으며,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믿음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를 들어 의사가 고위험 수술을 제안하기 전에 먼저 다른 방법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필요한 이유이며, 당신이 중고차를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전에 독립적인 정비사가 차를 점검해 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믿음의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트럼프의 주장, 특히 선거 부정에 대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강력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할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증거는 그것들을 의심할 이유들—50개 주에서 독립적으로 결과를 검증했고, 트럼프가 속한 정당의 소속 판사를 포함한 최소 9명의 연방 판사들이 기각하는 등 음모에 대한 모든 반대 증거들—을 고려할 때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증거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트럼프의 말(그들의 영웅의 증언, 비록 그 자체는 증거에 거의 또는 전혀 근거하지 않았지만)과 그들이 신뢰하는 소식통들로부터의 반복된 보고가 어느 정도 증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트럼프의 추종자들이 트럼프에게 부정선거 주장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요구했다면 어땠을까요?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윤리를 충실히 따랐다면 비윤리적인 행동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성급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MAGA 폭동 주동자들을 매우 엄격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의 문제점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건강, 과학, 윤리, 정의 등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서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 중 상당수는 강력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 정보 제공자로 여기는 사람과 정보 출처의 신뢰성을 철저히 평가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신중하고 편견 없는 조사를 하나요? 자주는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그냥 받아들인 다음, 그 믿음이 부정확하다는 증거를 무시하고 “합리화“하기도 하고, 그 믿음이 도전받게 되면 아무리 빈약한 것이든 상관없이 찾을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찾으려 합니다.

이는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강력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생각들—우리가 우리의 “부족“, 즉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집단의 일원임을 뒷받침해주는 특정 생각들—을 믿고 싶은 욕구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증거를 찾는 것을 중단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좋은 증거 없이 믿을 때 그 오류를 쉽게 인식하며, 특히 그 결과가 극단적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이러한 경향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적절한 증거 없이 믿는 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오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국회의사당에서 본 것과 같은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짓 이분법—우리는 이성적인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쳤“거나 그보다 더 나쁘다는 잘못된 이분법—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유형의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것은 “whataboutism”(그쪽이야말로주의: 상대방의 비판이나 주장을 직접 반박하기보다는 직접 관련이 없는 상대방이나 제3자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주의를 분산시키고 비판을 회피하는 전략)이 아닙니다. 저는 MAGA 폭도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바이든 지지자들이 일반적으로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믿음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의 사려 깊은 판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우리 모두가 자신의 믿음 중 많은 부분을 잘못되고 결함이 있는 방식으로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공통점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분열을 치유하는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종 (어떤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여)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믿음을 잘못된 방식으로 갖게 된다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흔히 제안되는 많은 해결책들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습니다.

한 가지 장기적인 제안은 국가적으로 비판적 사고미디어 문해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더 나은 교육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교육받은’ 사람들도 불충분한 증거에 근거해 믿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악습에 빠질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이것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을 광범위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특히 이러한 기술들이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자주 거부되는 상황에서? 만약 너무 많은 학부모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학교에 도입할 수 있을까요? 이 제안은 이론적으로는 좋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은 현실화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한 가지 대응은 증거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증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더 많이 상호 작용하도록 장려하여 후자가 강력한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을 위해서는 증거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강력한 증거의 필요성을 널리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전문성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를 감안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증거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태도가 다른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증거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우리의 성향은 가르치거나 사회화하는 방식으로 없앨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수 없다면 어쩌면 우리가 잘못된 정보와의 상호작용을 줄이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조직할 기회를 덜 갖도록 환경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상과 결사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지 않으면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러한 정보를 통제하고 상호작용을 관리할까요? 또한, 누군가가(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정한다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좋은 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또 다른 제안은 강력한 증거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 권력을 갖고, 강력한 증거도 없고 증거에 관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하도록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안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 지식인에 의한 통치)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지식인으로 간주되어야 할까요?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지식은 부패할 수 있고, 지식이 많은 것과 공정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없으므로, 이러한 지식인 통치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를 시도해 볼 의향은 어쩌면 그것이 지식이 부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할지에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것이 그들에게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주고, 그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실제로도 존중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경제적인 개선과 지위의 변화만으로도 사람들이, 적어도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증거에 반하는 믿음을 가질 동기를 해소할 수 있고, 따라서 큰 정치적 변화는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돈과 지위로 항상 품위까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우리 각자는 시민으로서, 미국인으로서” “진실을 수호하고 거짓을 물리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의무를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지 알아내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바이든은 또한 이번 선거가 미국의 “영혼“에 관한 선거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 영혼의 일부이며,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증거를 찾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교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을 변형하여 말하자면, “증거는 언제나 선한 것이다.”(Evidence is good, all the time. 역주: ‘God is good, all the time’(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의 변형)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두 동의하고 믿음의 윤리학이 요구하는 대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믿음을 지지해 줄 강력한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합시다.

2021년 2월 2일.

네이선 노비스(Nathan Nobis) 박사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는 모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의 철학 부교수입니다.


Nathan Nobis의 The Ethics of Belief: It’s not just Trump supporters who believe wrongly—it’s all of us을 번역한 글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아서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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