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부정의 – Huzeyfe Demirtas

배심원단이 흑인은 많은 경우 신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흑인 피고의 증언을 배척한다고 가정해 보자. 또는 이사회의 남성 위원들이 여성은 비이성적인 경우가 너무 많다는 믿음 때문에 여성 동료의 제안을 거부한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여성의 산후 우울증(pospartum derpression)을 의사가 단순한 “감정 기복”(baby blues)이라고 일축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1]

위의 세 사람은 모두 현대 영국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Miranda Fricker)가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라고 부르는 것을 겪고 있다.[2] “인식적”이란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적 부정의는 누군가를 지식의 소유자 또는 전달자로서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즉, 정당화되지 않은 편견 때문에 누군가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당하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를 증언적(testimonial) 부정의와 해석학적(hermeneutical) 부정의, 이렇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인식적 부정의의 유형들을 설명하고, 이를 방지할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살펴본다.


1. 증언적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

증언(testimony)은 누군가가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증언은 일반적으로 길 안내, 뉴스 보도, 연구 논문 작성 등의 경우에서처럼 사람들이 소통을 할 때 이루어진다. 증언은 단순히 법정에서의 진술만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식을 얻을 때마다 증언에 의존한다. 증언은 주장된 내용이 참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증언하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를 [실제로] 알고 있을 때 신뢰할 수 있다.[3]

누군가의 증언의 신뢰성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증언 자체의 불합리성 때문이 아닌 편견 때문일 때, 증언자는 증언적 부정의를 겪는 것이다.[4] 이러한 편견은 인종, 젠더, 억양, 나이 등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경제, 교육, 직업, 성, 법률, 정치, 종교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편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증언적 부정의들이 증언적 부정의의 중심 사례를 구성한다.

증언적 부정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이사의 예측이 남성 동료들의 편견으로 인해 거부될 수 있는데, 이를 증언 묵살하기(testimonial quieting)라고 한다. 또는 여성 이사가 부적절하게 낮은 신뢰도를 받을 것을 알고 애초에 침묵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제한할 수도 있다.[5] 이를 증언 억누르기(testimonial smothering)라고 한다.


2. 해석학적 부정의(Hermeneutical Injustice)

인식적 부정의의 두 번째 유형은 해석학적 부정의로 알려져 있다. “해석학적”은 해석 및 이해와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성희롱을 생각해 보라.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성희롱 개념이 도입된 1970년대 이전에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 여성을 상상해 보라.[6] 그녀는 원치 않는 성적 제안이 일종의 가벼운 “장난”(flirting)으로 여겨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유머 감각 부족”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성희롱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단어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해석학적 부정의는 경험을 적절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 결여된 경우에 관한 것이다. 해석학적 부정의는 이러한 실패가 궁극적으로 편견으로 인한 것일 때, 즉 편견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갖지 못한 경우에 발생한다.[7] 위의 부정의는 언론계, 정치계, 학계, 법조계와 같은 특정 직업군에서 여성이 (부분적으로) 배제되어온 것이, 여성의 경험에 대한 편향적 해석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성희롱을 일종의 단순한 장난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러한 편향적 해석의 한 예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석학적 부정의가 발생하는 데에는 개념의 결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특정 집단의 경험에 대한 해석과 그에 따른 개념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일축되는 경우에도 해석학적 부정의는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후 우울증(pospartum derpression)은 진정한 의학적 질환이 아닌 개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일축될 수 있다. 이를 해석학적 이의제기(hermeneutical dissent)라고 한다.[8]

증언적 부정의와 달리 해석학적 부정의는 청자 개인의 편견의 결과가 아니며, 한 명의 주체가 해석학적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9] 성희롱의 예에서 사람들이 성희롱 개념을 결여하게 된 것은 어떤 개인의 편견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의 편견적 관행의 결과였다.


3. 인식적 부정의의 해악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인식적 부정의는 피해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식적 부정의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심각한 실질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부당하게 신뢰를 얻지 못한 피고인은 자유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회사의 미래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사회 구성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식적 부정의는 또한 피해자의 정체성에도 해를 끼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분적으로 우리가 속한 (인종적, 성적, 종교적, 정치적) 집단의 정체성에 따라 자신을 정의한다. 우리는 이러한 정체성의 부분을 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이용 가능한 개념적 자원을 활용하여 구성한다.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자신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자원이 부족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는 여성이 정치적 대화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된다면, 그녀는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거의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10]


4. 인식적 부정의를 방지하는 방법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를 방지하기 위해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 특성(미덕)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11]

우리는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잠재적 편견을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증언자에게 낮은 신뢰도를 부여한 것이 편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러한 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12]

편견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 데 부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의 경험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편견이 없는 분위기에서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노력이 유용하긴 하지만 인식적 부정의를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교육은 신뢰성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하지만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공정한 교육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사회 제도의 근본적인 부정의로 인해 부당하게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지식 관련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13]


5. 결론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지식과 관련된 불공정성이나 인식적 부정의의 해악도 크다. 이러한 부정의를 바로잡고 피하려면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진지한 개인적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주석

[1] 인식적 부정의 종류와 그 예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Medina and Pohlhaus (2017) 참조.

[2] Fricker (2007, p. 7).

[3] 증언의 인식론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Green, Epistemology of Testimony 참조.

[4]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자는 편견으로 인해 합당한 수준과는 다른 수준의 신뢰도를 부여받을 때 증언적 부정의를 겪게 된다. 따라서 증언자는 자신의 증언이 실제보다 더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도 증언적 부정의를 겪을 수 있다. 프리커는 자신의 증언의 신뢰성이 [합당한 정도보다] 더 높다고 판단되는 개별 사례들은 증언적 부정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사례가 드물게 증언적 부정의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Fricker 2007, 20-21). 데이비스(Davis, 2016)는 증언자의 증언이 [합당한 정도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것이 프리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 데이비스는 증언적 부정의가 잘못인 주된 이유는 피해자가 단지 한 집단의 일원으로만 취급되고 고유한 개인으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긍정적) 고정관념에 기반한 (긍정적) 편견으로 인해 증언자가 더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될 때, 그는 단지 집단의 일원으로만 취급될 뿐 고유한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다.

[5] Doston (2011). 진술과 설명 외에 질문하는 것 역시 부당하게 취급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거나 주제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며 부당하게 무시될 수 있다(Hookway 2010).

[6] 성희롱 개념이 어떻게 도입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Fricker(2007, 149-152) 참조.

[7] Fricker (2007, p. 158).

[8] Goetze (2018).

[9] Fricker (2007, p. 159). 그러나 프리커는 이렇게 지적한다. “해석학적 부정의는 개인에 의해 저질러지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개인 간의 대화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Fricker, 2007, 18)

[10] Fricker (2007, p. 54).

[11] 프리커는 인식적 부정의의 두 가지 유형에 대응하는 두 가지 성격 특성을 구분하고 이를 증언적 정의의 미덕해석학적 정의의 미덕이라고 부른다. 미덕은 대략 정직, 관대함, 연민과 같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격적 특성을 말한다.

[12] 이것은 증언적 정의의 미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개인적인 친숙함을 통한 것이다. 특정 억양이 공정한 신뢰성 판단에 장애가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억양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 이 장애물이 사라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 사람들의 인종, 나이, 억양 등은 더 이상 신뢰도와 관련 없는 요소가 될 수 있다(Fricker 2007, 96). 프리커는 또한 “신뢰성을 판단하는 일 전체가 너무 불확실해지면 우리는 판단을 완전히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Fricker 2007, 92).

[13] Anderson (2012).


참고문헌

Anderson, Elizabeth (2012) “Epistemic Justice as a Virtue of Social Institutions,” Social Epistemology: A Journal of Knowledge, Culture and Policy, 26(2): 163–173.

Davis, Emmalon (2016) “Typecasts, Tokens, and Spokespersons: A Case for Credibility Excess as Testimonial Injustice,” Hypatia, 31(3): 485-501.

Dotson, Kristie (2011) “Tracking Epistemic Violence, Tracking Practices of Silencing,” Hypatia: A Journal of Feminist Philosophy, 26(2): 236–257.

Fricker, Miranda (2007) Epistemic Injustice: Power and the Ethics of Knowing.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Green, Christopher R. “Epistemology of Testimony,” The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ISSN 2161-0002, https://www.iep.utm.edu/, accessed 06 June 2020.

Goetze, Trystan S. (2018) “Hermeneutical Dissent and the Species of Hermeneutical Injustice,” Hypatia: A Journal of Feminist Philosophy, 33: 73–90.

Hookway, Christopher (2010) “Some Varieties of Epistemic Injustice: Reflections on Fricker,” Episteme, 7: 151–63.

Kidd, I., Medina, J. & Pohlhaus, G. (2017) The Routledge Handbook of Epistemic Injustice. London New York: Routledge, Taylor & Francis Group.


관련 에세이

Moral Testimony by Annaleigh Curtis (번역본: 도덕적 증언)

Take My Word for It: On Testimony by Spencer Case (번역본: 제 말을 믿으세요: 증언에 대하여)

What Is Misogyny? by Odelia Zuckerman and Clair Morrissey

Is it Wrong to Believe Without Sufficient Evidence? W.K. Clifford’s “The Ethics of Belief” by Spencer Case (번역본: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것은 잘못인가? W.K. 클리포드의 “믿음의 윤리학”)

Philosophy and Race: An Introduction to Philosophy of Race by Thomas Metcalf

Indoctrination: What is it to Indoctrinate Someone? by Chris Ranalli

The Epistemology of Disagreement by Jonathan Matheson (번역본: 의견 불일치의 인식론)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by Thomas Metcalf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by Todd R. Long


감사의 말

이 글의 이전 버전에 대해 귀중한 의견을 제공해 주신 Shane Gronholz, Chelsea Haramia, Kellan D L Head, Sanggu Lee, Dan Lowe, YaoJun Lu, Thomas Metcalf, Nathan Nobis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저자 소개

후제페 데미르타스(Huzeyfe Demirtas)는 채프먼 대학교(Chapman University)의 스미스 정치경제 및 철학 연구소(Smith Institute for Political Economy and Philosophy)의 박사후 연구원입니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도덕적 책임, AI 윤리, 응용 윤리, 특히 환경 윤리입니다. philpeople.org/profiles/huzeyfe-demirtas-1


이 글은 Huzeyfe Demirtas의 Epistemic Injustice를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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