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고, 그것을 왜 믿는지 이유를 제시한다면, 그는 논증을 하는 것이다.[1]
논증이란 어떤 서술문(“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서술문 또는 이유(“전제”)들의 집합이다.[2] 사람들은 매일 온갖 종류의 문제에 대해 논증을 하기도 하고 논증을 마주치기도 한다.[3]
이 글에서는 논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논증이 어떻게 좋거나 나쁠 수 있는지 소개한다.
1. 논증의 구성 요소: 전제와 결론
논증에는 하나의 결론과 하나 이상의 전제가 있다. 논증의 결론은 논증을 통해 설득하려 하는 논제이다.[4] 전제는 결론을 믿을 이유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5]
철학자들은 논증을 논의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종종 전제와 결론에 번호를 매긴다. 예시:
- 모든 말은 포유류이다.
- 세바스찬은 말이다.
- 그러므로 세바스찬은 포유류이다.[6]
일반적으로 결론은 목록의 마지막에 두는 것이 가장 명확하다.
저자들은 종종 “그러므로 …”, “그래서 …”, “따라서 …”, “그러니까”, “이로부터 …이 따라 나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결론을 표시한다. 전제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왜냐하면 …”, “… 때문에”, “…이므로”, “가장 좋은 증거는 …”과 같은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2. 논증의 타당성(validity)과 강도(strength)
논증의 질을 위해서는 내용뿐 아니라 구조도 중요하다. 좋은 논증의 전제는 적절한 방식으로 결론과 관련되어 있다. 즉, 좋은 논증의 전제는 결론으로 이끌고 결론을 뒷받침한다. 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2.1. 타당한 논증(Valid Arguments)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라면, 논증의 결론도 참이라는 것이 그 전제들에 의해 보장될 때, 그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다.[7] “타당하다”는 철학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논증의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인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시:
- 어떤 도형이 정육면체라면, 그것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 이 도형은 정육면체이다.
- 그러므로, 이 도형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1)과 (2)가 참이면서 (3)이 참이 아닌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논증에서는, (1)과 (2)가 참이면서 (3)이 참이 아닌 것이 가능하다:
- 어떤 도형이 정육면체라면, 그것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 그러므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정육면체 모양이다.
대부분의 건물에는 모서리가 있지만 건물이 정육면체 모양은 아니므로 이 논증은 부당하다(invalid): 즉,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있다.[8]
중요한 것은 이 두 논증의 전제들은 모두 참이라는 것이다.[9] 논증은 모든 전제가 참이면서도 부당할 수 있다. 타당성은 전제들이 실제로 참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약 참이라면 결론을 보장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 태양계에는 72개의 행성이 있다.
- 72는 소수(prime number)이다.
- 그러므로 태양계에 있는 행성의 수는 소수이다.
이 논증의 전제들은 거짓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들이 참이라면, 논증의 결론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논증은 (철학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 “타당한”의 의미에서) 타당한 논증이다.
2.2. 강한 논증(Strong Arguments)
논증의 전제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결론을 뒷받침한다: 우리의 배경 지식을 고려할 때, 만약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일 개연성이 높다.[10] 이러한 논증을 강한 논증이라고 한다.
예시:
- 누군가 루브르 박물관에 얼룩말을 풀어 놓았다.
- 모나리자에 얼룩말에 깨문 것 같은 이빨 자국이 있다.
- 그러므로 모나리자는 얼룩말에 의해 훼손되었다.
얼룩말과 모나리자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1)-(2)가 참이라면 (3) 역시 참일 개연성이 높다. 이 논증은 강한 논증이다.
강한 논증에서는 전제들이 (그것들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하지만, 타당한 논증과 달리 결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이빨 자국이 다른 동물의 것이거나 위조된 것이거나 또는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위의 논증은 강하지만 타당하지는 않다.
2.3. 주의 사항
논증의 강도와 타당성은 좋은 논증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지만, 논증이 강하거나 타당하다고 해서 그 결론이 실제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논증이 약하거나 부당하다는 것이 논증의 결론이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강도과 타당성은 전제들과 결론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제를 믿는 것이 합리적인지, 전제에 대한 좋은 증거가 있는지, 또는 누군가가 모든 전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여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11]
3. 논증의 건전성(Soundness)과 설득력(Cogency)
논증이 타당하고 전제들이 모두 참일 때, 그 논증은 건전하다(sound).[12] 예시:
- 어떤 것이 물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수소를 포함한다.
- 바다는 물을 포함한다.
- 그러므로 바다는 수소를 포함한다.
건전한 논증의 결론은 항상 참이다.[13] 논증이 타당할 때,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라는 것은 결론이 참인 것을 보장할 것이고, 따라서 전제들이 참이라면 (그리고 논증이 타당하다면), 결론은 참이다.
논증이 강하고 전제들이 모두 참일 때, 그 논증은 설득력 있다. 예시:
- 많은 무작위 대조 시험에서 아스피린을 복용한 사람들은 위약을 복용한 사람들보다 열이 낮았다.
- 그러므로 아스피린은 열을 낮춘다.
이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열을 낮춘 것이 아스피린 자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적어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강하고 설득력 있는 논증일 것이다.[14]
설득력 있는 논증(Cogent argument)의 결론은 항상 참일 개연성이 높다.[15] 논증이 강하다면,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라는 것은 결론이 참일 개연성이 높게 만들 것이고, 따라서 만약 전제들이 참이라면 (그리고 논증이 강하다면), 결론은 참일 개연성이 높다.
어떤 논증에 반대하려면, 논증이 건전하지 않거나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즉, 그 논증이 부당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거짓이거나 정당화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또는 둘 모두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4. 결론: 논증 사용하기
철학자들은 논증이 사람들이 결론을 믿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 연구한다. 논증은 사람들이 전제들을 받아들이지만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때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16] 누군가가 논증의 전제들이 참이라고 믿고, 전제들이 참이라면 결론도 참이라고(또는 참일 개연성이 높다고) 믿는다면, 그가 결론도 참이라고 믿지 않는 것은 모순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 같다.[17]
어떻게 사람들이 나를 믿도록 그들을 설득하거나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논증이라고 해서 항상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18] 그러나 때로는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주석
[1] 여기서 “이유”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내세우는 주장(예를 들어 믿음이나 경험, 또는 그 경험에 관한 믿음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누군가의 믿음이나 생각의 “이유”에 대해 주장할 때, 그 믿음의 원인을 말하려고 한다: “그는 질투심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 등등. 사람들이 가진 믿음의 심리적 원인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논증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또는 제시하려 하는 주장들이 아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믿음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종종 잘못된 주장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 당신이 무언가를 믿도록 만드는 동기에 대해 주장할 때, 그들이 대개 옳은지, 아니면 대개 틀린지 생각해 보라.
[2] 일상적으로는 서로 의견이 충돌하거나 심지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다툴 때 이를 두고 서로 “논쟁한다”(argue)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에서 “논증”(argument)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제시되는 일련의 서술문들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문장의 집합은 그 뒤에 어떤 의도가 있을 때에만 논증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사람들에게 결론을 설득하는 등의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만 논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장 집합을 무작위로 생성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사람이 제시했다면 건전한(sound) 논증이 되었을 문장 집합을 생성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프로그램은 매우 단순하다. 확실히 인공지능이 아니며, 어떤 의도나 목표, 믿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위로 생성된 이 문장 집합 자체가 논증일까? 어떤 지적인 사람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뒤에 어떤 의도도 없었는데도 이것을 논증이라 할 수 있을까? 논증이기 위해 의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룰 필요는 없다. 이 문제에 관심 있다면 다른 출처를 참고하라 (McKeon, n.d., 1 절).
또한 이 정의에 따르면 전제는 서술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논증은 (예를 들어) 수사적 질문을 하는 의문문을 전제로 삼을 수도 있고, 지시를 하는 명령문을 결론으로 삼을 수도 있다(“그러므로 방을 청소해라!”).
[3]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증거가 될 만한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우리는 논증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제품의 리뷰를 읽었거나 트위터에서 누군가의 의견을 읽었거나, 아이가 취침 시간을 넘겨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를 당신에게 설명하려고 했을 때, 아마 당신은 적어도 하나의 논증을 접했을 것이다.
[4] 엄밀히 말하면, 제시된 논증에는 명시적으로 서술된 결론이 아예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 “20달러를 기부하시면 아이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정수 필터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후 기대에 찬 표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이 경우 한 가지 전제만을 제시하고 결론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논증을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암묵적인 결론은 “그러므로 당신은 20달러를 기부해야 합니다”일 것이다. 또한, 2번 주석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논증을 그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5] 이러한 전제들 중 일부는 이전 전제들에서 나온 결론일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라. 이를 “소결론”(sub-conclus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글의 설명은 철학에서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논증에 적용되지만, 다른 것들이 논증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누군가는 논증을 ‘정확히 하나의 문장을 결론으로 갖는 문장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정의를 따른다면, 일부 전제들은 결론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이는 또한 하나의 문장 집합에서 전제와 결론의 조합(combination) 수만큼 많은 별개의 논증이 만들어지는 것을 허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문장 집합에 n개의 문장이 있다면 그 집합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논증은 n × (n-1)! 개라고 할 수 있다. 즉, 각 결론에 대해 가능한 전제들의 배열마다 논증이 하나씩 있는 것이다. 이 정의는 논증의 강도(strength)와 타당성(validity)에 대한 표준적인 정의와 양립할 수 있다.
[6] 또한 전제와 결론을 그에 해당하는 문자로 표기하는 것도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이 논증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다: “(P1) 모든 말은 포유류이다. (P2) 세바스찬은 말이다. (C1) 그러므로 세바스찬은 포유류이다.”
[7] 따라서 이러한 논증은 명백히 강한(strong) 논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타당한 논증을 (단순히) “강하다”고 묘사하는 것은 끓는 물을 “따뜻하다”고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타당성과 건전성(soundness)은 일반적으로 ‘참'(truth) 이라는 용어를 통해 정의되지만(예를 들어, ‘타당한 논증에서는 결론이 참이 아니면 전제도 참일 수 없다’), 우리는 전제가 정당화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구분은 실제로는 대부분 중요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어떤 전제가 참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은 암묵적으로 그 전제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 이 논증은 “후건 긍정”(Affirming the Consequent)이라는 “형식적”(형식 기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오류는 논증이 p라면-q이다(if-p-then-q)와 q를 포함하고 이것을 근거로 p를 추론할 때 발생한다. 이와 유사한 오류로는 전건 부정(Denying the Antecedent)이 있다. 이는 논증이 p라면-q이다(if-p-then-q)와 p가-아니다(not-p)를 포함하고, 이것을 근거로 q가-아니다(not-q)를 추론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형식을 가진 어떤 논증도 (p와 q가 논리적으로 동치인 경우를 제외하면)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이 형식들은 일부 타당한 논증 형식들과 외형이 유사하다. 전건 긍정(Modus ponens)은 p라면-q이다(if-p-then-q)와 p를 긍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q를 결론으로 내리는 논증 형식이며, 후건 부정(Modus tollens)은 p라면-q이다(if-p-then-q)와 q가-아니다(not-q)를 긍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p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논증 형식이다. 긴 오류 목록을 보려면 Dowden (n.d.)를 참고하라.
[9]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참이다”가 일반적으로 “세계의 사실에 대응한다”를 의미한다고 믿는다(PhilPapers n.d.): 이것은 진리 대응론(the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다(Glanzberg, 2022, 1.1 절). 예를 들어, 누군가가 “교실에 적어도 하나의 책상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교실에 적어도 하나의 책상이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참이다. 이때 교실에 하나의 책상이 있다는 것은 그가 말한 것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세계의 사실이다. 누군가가 “교실에 코끼리가 열두 마리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교실에 코끼리가 열두 마리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참이 아니고 거짓이다다. 이 경우 교실에 코끼리 열두 마리가 있지 않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이다.
[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론이 참일 개연성이 높은지 여부는 청자의 지식 정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추가되는 증거는 결론에 반하는 증거가 되어 더 이상 결론이 정당화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합리성의 기본 원칙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 결론은 새로운 증거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육면체에는 모서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설득력이 있지만 건전하지는 않은 논증의 경우, 새로운 증거는 실제로 그 결론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참일 개연성이 높은지 여부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고려해야 한다는 전체 증거 요건(the Requirement of Total Evidence 또는 the Total-Evidence Requirement)을 언급한다. 결국, 결론이 전제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보가 그 결론에 대한 우리의 신념도(credence)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이 요건과 오늘날의 논쟁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최근 논의로는 Barrett and Sober(2022) 및 Draper(2020)를 참조하라. 보다 일반적인 논의는 Wilson(1999, 13.1.2절)과 Howson & Urbach(2006, 164쪽)를 참조하라.
결론이 참일 개연성이 높은지 여부가 청자의 지식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논증의 설득력이 청자에 따라 상대적임을 함축한다. 이것은 그럴듯하다. 사람마다 이용 가능한 전체 증거가 다르고, 같은 논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사람에 따라 합리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면서 숨기고 있는데, 배심원단은 피고인 측 변호자의 논증에 합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다. 그들은 피고인이 알면서 숨기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것을 기억하는) 피고인이 변호사의 논증에 근거해서 자신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아마도 비합리적일 것이다.
[11] 강한 논증과 타당한 논증은 정당화되지 않은 전제를 가질 수도 있고, 정당화된 전제를 가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확신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찰스 미첼리(Charles Miceli)의 “I think, therefore I am”: Descartes on the Foundations of Knowledge와 토마스 멧칼프(Thomas Metcalf)의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그리고 토드 R. 롱(Todd R. Long)의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를 참조하라. 하지만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만약 내가 무언가에 대해 67% 이상의 신뢰를 갖는 것이 정당화되는 경우 그것을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간주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p를 믿는 것에 대해 67%의 신뢰도가 정당화되고, p이면-q이다를 믿는 것에 대해 67%의 신뢰도가 정당화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두 전제가 통계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q를 믿는 것에 대해서는 단지 44%만 정당화되고, 따라서 “정당화된다”고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p를 믿는 것에 대해 “정당화된다”고 하고 p이면-q이다를 믿는 것에 대해서도 “정당화된다”고 하면서 q를 믿는 것에 대해 “정당화된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 문제는 정당화가 확실성 또는 그에 매우 가까운 것을 요구하는 경우 사라진다. Collins (n.d.)와 토마스 멧캐프(Thomas Metcalf)의 The Probability Calculus을 참조하라.
[12]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또 다른 지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모든 전제가 참일 필요는 없으며, 결론을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추론하는데 필요한 전제의 적절한 부분집합만 참이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 연역은 단조적(monotonic)이다. 즉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에 전제를 추가하는 것은 그것을 부당하게 만들 수 없다. 예시: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물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을 운명이다.” 이 논증은 분명히 결론을 연역적으로 타당하게 증명하며, 모든 전제를 믿을 정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결론을 믿을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성의 표준 정의를 유지하되 일부 건전하지 않은 논증은 결론을 증명한다는 점을 추가할 수도 있고, 아니면 건전한 논증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다. ‘건전한 논증은 타당하며, 다음의 조건을 만족하는 전제의 부분집합 S가 있는 논증이다: (1) S를 전제로 하고 원래 논증의 결론을 결론으로 하는 논증은 타당하고 (2) S에 포함된 모든 전제가 참이다.’ 이것은 단지 용어상의 논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연역적인 논증이 단조적(monotonic)이라는 중요한 점을 상기시켜 준다.
[13] 이와 유사하게, 타당하고 건전한 논증의 결론은 그 전제들의 집합보다 덜 정당화되지 않는다. 반면에, 강한 (그러나 타당하지 않은) 논증은 때때로 전제들의 집합보다 덜 정당화되는 결론을 가질 수 있다. 전제들이 정당화되더라도 결론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14] 우리가 모르는 증거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결론을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증의 강도는 청자에 상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 주석 10을 참조하라. 반면 일반적으로 논증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청자에 상대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하라. 이는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참이 아닐 수 있는지 여부는 청자의 지식과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연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청자의 지식은 제외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Carroll (1895) 참조.).
[15] 반대 증거는 그 결론에 반대하는 증거를 말한다. 예를 들어 다른 논증으로부터 반대 증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가설에 의해 설득력 있는, 원래 논증 자체에 대한 비판은 반대 증거가 아니다). 주석 10을 참조하라.
[16] 만약 청자가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설득될 이유가 없다. 만약 그가 이미 결론을 받아들였다면, 그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만약 전제가 결론에 대한 좋은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를 사용하여 그 결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논증은 청자가 전제를 받아들이지만 아직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실제로, 만약 누군가가 청자에게 그가 이미 당신의 결론을 받아들였을 때만 받아들일 전제를 제시하며 결론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선결문제요구”(Begging the Question)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오류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Sinnott-Armstrong (1999)을 참조하라.
[17] Carroll (1895)에서 이에 대한 재미있는 논의를 볼 수 있다.
[18] 이것은 반드시 논증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일부 청자는 단순히 비합리적일 수 있다.
청자를 설득하는 방법은 주로 심리학의 주제이다. 예를 들어 Psychology Today(n.d.)를 참조하라. 이론적으로, 만약 당신의 청자가 이성적이고 당신이 그에게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한다면, 그는 마음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이성적이다. 이 현상에 대해 잘 연구된 분야 중 하나는 정치학이다. 예를 들어 Caplan (2008)과 Somin (2016)을 참조하라.
참고 문헌
Caplan, Bryan. (2008). The Myth of the Rational Voter (new 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번역본: 브라이언 캐플란, 김행범 외 역, 『합리적 투표자에 대한 미신』, 북코리아, 2008.)
Caroll, Lewis. (1895).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les. Mind, 4(14), 278–280.
PhilPapers. (N.d.). Survey results: Truth. Philpeople.org.
Psychology Today. (N.d.). Persuasion. Psychologytoday.com.
Somin, Ilya. (2016). Democracy and Political Ignorance (2nd ed.). Stanford University Press.
더 읽을 것들
Feldman, Richard. 1998. Reason & Argument, 2nd Edition. Pearson.
Pryor, James. “What is an Argument?”
관련 에세이
Critical Thinking: What is it to be a critical thinker? by Carolina Flores (번역본: 비판적 사고: 비판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Classical Syllogisms by Timothy Eshing
Contemporary Syllogisms by Timothy Eshing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by Todd R. Long
Formal Logic: Symbolizing Arguments in Sentential Logic by Thomas Metcalf
Formal Logic: Symbolizing Arguments in Quantificational or Predicate Logic by Timothy Eshing
Interpretations of Probability by Thomas Metcalf
The Probability Calculus by Thomas Metcalf
Bayesianism by Thomas Metcalf
The Problem of Induction by Kenneth Blake Vernon
What is Philosophy? by Thomas Metcalf (번역본: 철학이란 무엇인가?)
“I think, therefore I am”: Descartes on the Foundations of Knowledge by Charles Miceli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by Thomas Metcalf
저자 소개
톰 멧칼프(Tom Metcalf)는 앨라배마주 모바일에 있는 스프링힐 대학(Spring Hill College)의 부교수입니다.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윤리학, 메타윤리학, 인식론, 종교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합니다. 톰은 헤스페러스(Hesperus)와 포스포러스(Phosphorus)라는 이름의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http://shc.academia.edu/ThomasMetcalf
이 글은 Thomas Metcalf의 Arguments: Why Do You Believe What You Believe?를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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