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부조리한가?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을 때에만 그렇다 – Helena de Bresis

지난 학기 ‘삶의 의미’ 세미나를 진행하던 중에, 나는 문득 내가 강의실 동쪽 끝 창가 자리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몇 달 후 척추 수술을 할 예정이었고, 앉거나 서는 것이 힘들었다.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낭만주의자들,” 나는 머리 밑의 베개를 조정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진정성 있게’ 사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처음 주장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정성이 도덕을 뛰어넘는 궁극적인 이상이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했듯이 [여기서 나는 열정적으로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 본성을 따르는 것만이 옳고, 그에 반하는 것만이 그른 것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팔꿈치를 벽에 부딪쳤다. “결국 신성한 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의 진실성뿐입니다!”

나는 학생들을 올려다보며 주춤했다. 내 행동이 부조리해(absurd, 바보 같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든 후,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분석해 보았다. 정확히 왜 부조리한 것일까? 한 가지 설명에 따르면, 부조리는 기대와 현실, 목표와 결과, 또는 수단과 목적 사이의 눈에 띄는 간극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그 어긋남이 재미있기도 하다. 입주 작가의 연말 전시회에 잠자는 작가의 모습을 묘사한 아주 작고 단순한 디오라마(diorama, 실사 모형)만 전시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때로는 그 어긋남이 무서울 수도 있다. 화석 연료 업계에서 선호하는 인물이 환경 보호국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내 경우에 부조화는 교수가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지도력 및 권위와 내가 통나무 모양의 푹신한 베개를 베고 학생들의 눈높이보다 낮은 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 사이에 있었다.

내가 만약 경제학자나 역사학자였다면 누워서 하는 나의 강의가 그렇게까지 부조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운 자세든 아니든, 철학자에게는 특히 부조리한 점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1971년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이 제시한 부조리에 관한 가장 유명한 철학적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이글은 우리가 삶에서 무언가가—또는 모든 것이—부조리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의 충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는 참여하는 주체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내면으로부터,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바라보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거리를 둔 관찰자의 관점으로, 마치 다른 행성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의 활동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네이글은 이러한 두 관점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버섯 재배 수업이나, 매혹적인 대상에 대한 열병, 또는 직장 동료와의 골치 아픈 권력 다툼 등에 완전히 몰두한다. 그 다음 순간, 우리에게 정신적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우리는 마치 자신의 몸 위를 떠도는 영혼처럼 감정에서 벗어난 채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19세기 공리주의자 헨리 시지윅(Henry Sidgwick)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부조리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일종의 오리-토끼 착시 그림을 볼 때와 같은 영혼의 움직임으로 이 두 관점 사이를 빠르게 오갈 때 발생한다. 부조리에 대한 감각은 이러한 불안정성에 의존한다. 만약 우리가 내적 관점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일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 의심하는 충격을 결코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사를 영구적으로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가 축축한 통나무에 곰팡이를 붙이려고 애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갖는 않는 전업 수도자가 될 것이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다 들킬 일은 없는 사람 말이다.

네이글은 우리 모두가 우리 삶에 대한 내적 관점과 외적 관점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명 내적 관점과 외적 관점 중 어느 한 쪽에 자신을 더 많이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 중 일부는 불균형하게 한쪽 관점이 중요시되는 직업에 모여 있다. 철학 교수는 그러한 직업 중 하나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말할 때, 이것은 “진정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초연하게 생각해 보자”는 의미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철학자는 나머지 인류를 지배하는 일상적인 관심사나 열정적인 집착에서 분리되어 있다. 철학자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외적인 관점을 취한다. 쇠렌 키르케고르가 파티에서 쓰러졌을 때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침에 하녀가 쓸어버리게.”

만약 [철학자에 대한] 이 이미지가 정확하고 네이글의 설명이 옳다면, 철학자들은 네이글이 말하는 관점 중 하나에만 영원히 머물면서 인간 조건의 부조리함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철학자들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부조리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에는 역설의 냄새가 난다. 추상화와 초연함이 철학자의 주특기일 수 있지만, 철학자들은 종종 바로 그런 것들에 열정적으로 집착한다. 무관심에 대해 열정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추상적이다. 그들은 ‘비환원적 수반 인과'(Nonreducible Supervenient Causation)와 같은 제목의 논문을 수년간 집착적으로 매달려 쓰고는 학회에서 그에 대해 공개적으로 격론을 벌인다. 나는 이런 점이 철학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부조리하지만 동시에 사랑스러운 점은 이 사람들이 자신의 핵심적인 삶의 노력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노력의 역할이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통나무 베개를 베고 누워 있을 때 추상적이면서도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부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 개념을 단순한 어긋남이나 네이글이 말하는 보다 복잡한 관점의 부조화가 아닌 허무함(헛됨, futility)과 연관 짓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미끄러운 계단’이라는 일본 게임 쇼의 동영상이다. 이 쇼에서는 참가자들이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맨발로 얼음처럼 미끄러운 물질로 덮인 계단의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야 한다. 영상에는 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힘겹게, 필사적으로 이를 시도하고, 극적으로 다시 계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종종 다른 다섯 명을 함께 끌고 내려오는 장면이 담겨 있다. 댓글로 누군가가 ‘인생’이라고 적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한 가지 선택지는 우주를 향해 고귀한 주먹을 휘두르며 그 침묵하는 냉담함과 미끄러운 계단을 저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대학에 있는 특정 유형의 학생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여성, 장애인, 소수 민족, 성 소수자 등—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꽤 이른 시기에 깨달았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인생이 실망스럽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극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어깨를 으쓱하고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경향이 더 컸다.

네이글은 이와 비슷한 접근법을 추천한다. 그는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볼 때 어떤 것도 중요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면, 그것(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 역시도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의 부조리한 삶에 영웅주의나 절망 대신 아이러니로 접근할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1971년에 비해 2018년에는 아이러니가 덜 매력적일 수 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공격받는 것을 보는 것에는, 어떤 것들은 정말로 중요하다는 감각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선호하는 접근 방식은 이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부조리함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인간의 모든 추구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할 때에만 문제가 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부조리에 대한 설명 중 어느 것에도 그런 함축은 없다. 만약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진정한 인간 크기의 가치(의미 있음에 대한 도덕 철학자 수잔 울프(Susan Wolf)의 정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설령 부조화와 실패를 포함하고 있고 우주가 그 일이나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깊이와 목적을 가질 수 있다. 나의 허리가 망가지고, 학생들의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고, 그들의 부모가 힘들게 고생하고,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 학생들과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가 자리에서 올려다보며, 그 속에 몰입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낀 후에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자 소개

헬레나 드 브레시스(Helena de Bresis)는 매사추세츠주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철학 교수이다. 그녀는 Artful Truths: The Philosophy of Memoir (2021)와 How to Be Multiple: The Philosophy of Twins (2023)의 저자이다.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Is philosophy absurd? Only when you’re doing it right을 번역한 것입니다.
Aeon의 번역 및 배포 기준을 준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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