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역사적인 철학자와 철학에 대응하기 – Victor Fabian Abundez-Guerra & Nathan Nobis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많은 이들은 심각하게 잘못된 도덕관을 가졌거나 매우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기형적인 남성”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노예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해 불편한 견해를 가졌습니다. 흄과 칸트는 인종 차별주의자였습니다. 헤겔은 아프리카인을 폄하했습니다. 니체는 아픈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밀은 식민주의를 용인했습니다. 파농은 동성애 혐오자였습니다. 프레게는 반유대주의자였고 하이데거는 나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성차별주의자였습니다. 루소는 자녀를 버렸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린 제자들을 때렸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예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1]

이 철학자들은 지적 성취로 유명하지만, 그들의 믿음이나 행동에는 심각한 도덕적 또는 지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견해 중 일부는 거짓이고,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어쩌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뛰어난 철학자이지만 결함이 있는 과거의 인물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2] 이 글에서 우리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질문을 던지고 몇 가지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여기서 얻은 통찰은 현대의 결함 있는 철학자나 다른 분야의 학자,[3] 그리고 사람들 일반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1. 우려 사항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우려를 제기합니다:

A. 사람 명제:

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과 구별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명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상은 사상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4] 그렇다면 사람과 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B. 인신공격의 문제:

결함이 있는 철학자에 대한 일부 대응은 그들의 사상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공격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신공격은 종종 무책임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인신공격은 과연 적절한가요? 개인의 인격이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면 인신공격이 적절한가요?[5] 개인의 도덕적 악덕이 그들의 도덕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을까요?[6] 도덕철학이 아닌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을까요?

C. 주요 사상 vs 중요치 않은 사상: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주요” 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7] 그러나 그들의 결점은 때때로 그들의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저술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무엇이 주요 사상이고 무엇이 중요치 않은 사상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양? 질? 영향력? 그 철학자의 판단? 도덕적 평가? 아니면 이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인가요?

D. 반사실적 교정:

철학은 때때로 잘못된 (경험적) 정보로부터 또는 그것에 기초하여 발전합니다. 그 철학자가 더 나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의 철학이 더 나았을까요?

E. 사과용서:

살아있는 사람은 사과하고, 더 나은 행동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용서를 바라며 보상을 하려 할 수 있습니다. 결함이 있는 (죽은) 철학자들이 어떻게든 현재에 ‘보상’하거나, 특히 그들의 견해가 결국 개선되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8]

이외에도 관련해서 파악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는 일반적인 우려들이 있을 것입니다.

2. 대응

이제 몇 가지 일반적인 대응을 살펴봅시다.

A. 수용: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무시하기

한 가지 대응은, 우리 모두는 생각과 행동에 결함이 있으므로 결함이 있는 역사적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흥미롭고 좋은 측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9] 이는 특히 그들의 글이 그들의 나쁜 주장이나 행동과 명백한 관련이 없는 경우에 적절합니다.[10] 또한 우리는 종종 철학자의 개인적인 상황과 내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말이나 행동을 용서하지는 않더라도 이해해 줄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철학자들에게 나쁜 요소가 있고 우리가 그것들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학생들이 철학자에게 결함이 없다고 믿도록 오도하거나 속일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어떤 철학자를 존경하며 그는 덕의 화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11]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무시한다”는 대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결점 역시, 그것이 너무 심각하다면 (그러기를 바라더라도)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다른 누구의 결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너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B. 완전한 추방: 보이콧 & 파문

또 다른 대응책은 문제가 되는 철학자의 글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즉 보이콧을 하는 것입니다.[12]

‘무관용’ 정책은 때때로 동시대 사람들에 대해 큰 자신감을 가지고 적용되기도 합니다.[13] 이는 ‘그들이 그런 짓을 했으니 우리는 다시는 그들의 영화를 보지 않겠다(또는 추천하지 않겠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 그것에 장점이 있다면 여기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14]

하지만 요점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도 있습니다. 죽은 철학자들에게 이 “처벌”은 기껏해야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전”에서 삭제하는 것은 해당 철학자로부터 존중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편견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15]

하지만 “파문”은 너무 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철학자들과 학생들은 그 철학자의 통찰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모두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16] 또한 사상사에 구멍이 생기고, 덜 완전하고 무해한 역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잘못은 잊혀지고,[17] 결함이 있는 철학자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지장이 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18] 또한 철학자가 거의 남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C. 역사적 변호: 과거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쩌면 과거의 사상가를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후의 세대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될 [당대의] 모든 (도덕적) 가정들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19]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사상가들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용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비난 받을만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때 당시의 기준을 고려해볼 때, 그들은 단지 더 잘 알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20]

이러한 반응은 결함이 있는 철학자들이 정말로 잘 몰랐을 경우에만 효과가 있습니다.[21] 하지만 심지어 그들이 정말로 잘 몰랐을 경우에도, 우리는 그들이 더 잘 알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22] 철학자들은 비판적 사고와 가정에 대한 도전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도 그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23]

D. 결점 보완: 좋은 것을 사용하여 나쁜 것을 물리치기

이 반응은 위의 (A)와 마찬가지로 수용을 포함하지만, 나쁜 점을 간과하는 대신 그것을 드러내고, 철학자의 사상의 좋은 측면을 사용하여 나쁜 부분을 진단하고 수정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쁜 점을 감추는 것은 그 철학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이고 잠재적으로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철학자가 실제로는 악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자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철학자가 자신의 좋은 주장이 나쁜 주장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좋은 주장을 위해 나쁜 주장을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24]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좋은 주장이 아닌 나쁜 주장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25][26] 또는 그들은 그냥 긴장 관계를 무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철학자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비판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해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철학자의 글에 항상 나쁜 주장들을 비판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낙관적인 태도는 모든 결함 있는 철학자들에 대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구속에는 기회비용도 있습니다. 우리가 유명한 철학자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그들만큼 훌륭하거나 더 나은,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들(특히 소수자)이 간과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27]

3. 결론

물론 다른 대응도 가능하며, 일부는 여기서 논의한 대응과 겹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응 중 하나를 책임감 있게 적용하려면 일반적인 윤리적 우려 사항들의 적용 뿐 아니라 철학자의 삶과 철학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주석

[1] 부록 (번역본)에 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들을 모아놓았습니다.

[2] 칸트에 초점을 맞춘 논의는, Victor Fabian Abundez-Guerra’s “How to Deal with Kant’s Racism — In and Out of the Classroom,” Teaching Philosophy, 41, 2. May 19, 2018, pp 117-135.를 보십시오. 그의 논문은 이 글에서의 보다 일반적인 논의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3] 이와 관련하여 과거와 현재의 다른 분야의 학자 및 연구자들의 잘못된 행동과 주장에 대응하는 경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예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밝혀내는 연구를 하는 사회 과학자가 잘못된 행동으로 해당 사회 문제에 기여하거나, 해당 문제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사적으로 폄하하는 경우와 비교한다면, 잘못된 행위가 연구 분야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에는 우려는 비교적 적을 것이고, 해당 연구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험적 또는 과학적 문제에 도덕적 차원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연구자와 학자는 도덕적 동기를 가지고 사실에 대한 조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문제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그들의 결함은 철학자의 결함과 비슷한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4] 학자와 저술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싶은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죽었다”라는 격언, 즉 저자의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 배경과 의도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저자의 자서전적 회고록으로 보는 니체의 관점이 옳다면, 이러한 구분은 잘못될 것일 수 있습니다. Friedrich Nietzsche’s Beyond Good and Evil, Walter Kaufman (trans.), Vintage Books, [1886] 1989. §6을 참고하세요. (번역본: 니체, 박찬국 역, 『선악의 저편』, 아카넷, 2018.)

[5] “위선”의 혐의는 때때로 인신공격인데, 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옹호하는 원리를 따르는지 여부 자체는 그 원리가 참이거나 합리적인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는 사람이 도둑질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해서,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옹호되던 원리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일 경우에는 그것을 옹호하던 사람이 실제로는 그 원리를 믿지 않거나 그 원리를 받아들일 좋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또는, 어쩌면 좋은 이유가 실제로 없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단지 좋은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의 좋음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은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6] 현대 윤리학자들의 비윤리적 행동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Oliver Burkeman’s, “This column will change your life: why are ethicists so unethical?The Guardian, November 16, 2013.

[7] 우리가 철학자의 주요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철학자가 자신의 주요 사상으로 여겼던 것이나 과거 세대가 그의 주요 사상으로 여겼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8] 하이데거는 말년에 나치즘에 실망하였고, 일부 철학자들은 칸트가 결국 인종 차별적인 견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초기 견해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주어야 할까요? Pauline Kleingeld’s “Kant’s Second Thoughts on Race,” The Philosophical Quarterly, 57, 229, 2007, pp. 573-592.을 참고하세요.

[9] 이것은 Robert Louden이 “칸트의 글에는 많은 사적인 편견이 드러난다. … 그러나 다행히도 칸트의 이론은 그의 편견보다 강력하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이론이다.”라고 썼을 때 취한 전략과 비슷합니다. 그의 Kant’s Impure Ethics: From Rational Beings to Human Beings,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 177.을 참조하세요.

[10] 예를 들어, 프레게의 반유대주의와 그의 논리학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논리학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11] 만약 한 철학자의 저작물 가운데 나쁜 부분을 무시한다면, 편집된 저작 모음집을 그 철학자의 철학이라고 이해할 원칙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특히 해당 철학자가 그 나쁜 부분을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그것을 우리가 그의 좋은 사상이라고 간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는 (그의 인종차별적인 견해가 많이 발견되는) 인류학과 지리학 수업을 70번 이상 개설했지만, 도덕철학 수업은 28번 만을 개설했습니다. [나쁜 부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저작들을 그 철학자의 철학으로 해석할 경우, 새로운 철학자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역사를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Charles Mills은 칸트의 철학에서 나쁜 부분을 잘라내거나 “살균”(sanitize)하면, 남은 것들을 단순히 칸트의 철학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칸트의 실제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인간을 ‘인격’으로만 분류한 것이 아니라 ‘하위 인격’(subpersons)으로도 분류했다고 주장하는 그의 “Kant’s Untermenschen”을 보세요. Andrew Valls (ed.), Race and Racism in Modern Philosoph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p. 169-93.

[12]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완전한 보이콧을 할 능력은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결국,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 철학자는 과거에 정전의 일부였던 철학자로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 철학자는 분명 계속해서 일부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 예를 들어 성희롱 혐의로 비난 받은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온라인 토론을 보십시오. Jenny Saul Sheffield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가장 좋은 전략은 이 철학자들에 대해 가르치고 토론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이 말에 다음과 같이 단서를 답니다. “당신이 단지 특정 견해의 대표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대표로 선택함으로써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 문제의 철학자의 입장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해 논의하면 됩니다.” 이에 따라 문제가 되는 유명한 철학자 대신 덜 알려진 철학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철학의 정전을 다양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몇몇 논의들이 있습니다: “How to Discuss Searle, etc.Feminist Philosophers blog, March 28, 2017, 그리고 “John Searle may be guilty of sexual harassment…Leiter Reports blog, March 28, 2017.

[14] #미투 운동 이후 성범죄자의 작품을 보이콧하자는 주장이 다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Nicole Hemmer’s “How to think about consuming art made by sexual predators,” Vox, January 9, 2018, 그리고 Chuck Klosterman’s “On Boycotting Woody Allen’s Film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March 14, 2014, 등을 참조하세요.

[15] 하버마스도 독일에서 “역사대논쟁”(Historian’s Debate)에 참여할 때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역사적으로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무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에게는 독일인들의 손에 살해 당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기억을 왜곡 없이, 그 리고 지적인 형태에만 국한되지 않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벤야민의 유산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동료 유대인 시민들과 살해 당한 모든 사람의 아들과 딸, 손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숨을 쉴 수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의 “On the Public Use of History,” The New Conservatism, 1989, p 233.를 참조하세요.

[16] 죽은 사람이 해를 입을 수 있을지는 물론 흥미롭고 논쟁적인 철학적 주제입니다.

[17] 위의 15번 각주를 참조하세요.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교사가 노예제, 인종 분리,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경우에 미국 역사를 “화이트워싱”하게 된다는 우려와 유사합니다.

[18] 우리는 긍정적인 면이 많은 철학자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그들이 잘 알려진 철학자인 것에는 그럴 만한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장점이 없는 철학자, 즉 그들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이 나쁘고 잘못된 사람은 잘라내고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엘리자베스 반스(Elizabeth Barnes)는 “Arguments That Harm – and Why We Need Them,Chronicle Review, February 18, 2018.에서 괜찮은 것이 거의 없는 모욕적인 견해를 논의하는 데 드는 지적, 도덕적 비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19] 현대인들에 관해 말하자면,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 진보적 입장이 가장 합리적인 다른 중요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차성”에는 총체적인 실패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신공격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는 (참되고) 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짓이고 불합리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거짓이고 불합리한 믿음을 수정하는 데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관찰한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대부분은 이 글에서 논의하는 역사적 철학자들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논의는 80,000시간 팟캐스트의 Will MacAskill, “Our descendants will probably see us as moral monsters. What should we do about that?” January 19, 2018.를 참고하세요.

[20] 미란다 프릭커(Miranda Fricker)는 이 문제를 인식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와 관련해서 논의할 때, 과거의 성차별주의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만약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면, 그 잘못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Epistemic Injustice: Power and the Ethics of Know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 100.

[21] 예를 들어, 칸트는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탐험가들이 쓴 모든 종류의 여행 보고서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자료들이 신뢰성이 없고 반복적으로 경고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에 의존했습니다. Thomas McCarthy의 Race, Empire, and the Idea of Human Develop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 49. 참조.

[22] 인식론적, 혹은 지적 비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지만, Neal Tognazzini와 Justin D. Coates의 “Blam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6, Edward N. Zalta (ed.). 참조. 지적 비난에 초점을 맞춘 논의로는 Sanford C. Goldberg의 “Should have known.Synthese, 194, 8, 2017, pp. 2863-2894, 그리고 To the Best of Our Knowledge: Social Expectations and Epistemic Normativ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참조.

[23]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윤리를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예: 성직자)에게 일반적인 사람들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Eric Schwitzgebel는 그의 블로그 포스트에서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Should Ethics Professors Be Held to Higher Ethical Standards in Their Personal Behavior?

[24]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칸트가 그의 정언 명령을 사용해서 그의 인종차별적인 믿음을 없애거나, 밀이 그의 공리주의 원칙을 사용해서 식민주의에 대한 지지를 물리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25] Charles Mills의 “Kant’s Untermenschen” in Andrew Valls (ed.), Race and Racism in Modern Philosoph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p. 169-93.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Mills의 The Racial Contract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Emmanuel Chuckwudi Eze의 “The Color of Reason: The Idea of “Race” In Kant’s Anthropology” in Postcolonial African Philosophy: A Critical Reader,” in Emmanuel Chuckwudi Eze (ed.), Blackwell, 1997, pp. 103-140.도 참조하세요. 또한 Robert Bernasconi의 “Kant as an Unfamiliar Source of Racism” in Philosophers on Race: Critical Essays, Julie K. Ward and Tommy L. Lott (eds.), Blackwell, 2002, pp. 145-66.도 참조하세요.

[26] 만약 한 철학자의 사상에서 나쁜 측면과 좋은 측면이 개념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 즉 한 영역에서의 주장들이 다른 영역에서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 함축을 가진다면, 그것들은 긴장 관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이 긴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분석하고 추측하는 것은 우리가 미래에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을 피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David Livingstone Smith는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비인간화할 때, 그들이 가졌다고 여기는 믿음(예: 모든 사람은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과 그들이 원하는 실천(예: 소수자들을 노예화하거나 몰살시키는 것) 사이에는 인지적 부조화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에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부조화는 억압 받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부정함으로써,” 즉 억압 받는 사람들에게 인간 이하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Smith의 Less Than Human: Why We Demean, Enslave, and Exterminate Others, St. Martin’s Press, 2011, p. 3. (번역본: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김재경, 장영재 공역, 『인간 이하: 타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비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역사』, 웨일북, 2022.) 참조.

[27] 관련된 논의는 13번 주석 참조.

관련 에세이

Aristotle’s Defense of Slavery by Dan Lowe 

Ignorance and Blame by Daniel Miller

Introduction to Deontology: Kantian Ethics by Andrew Chapman

Introduction to Consequentialism by Shane Gronholz

Cultural Relativism: Do Cultural Norms Make Actions Right and Wrong? by Nathan Nobis 

Philosophy and Race: An Introduction to Philosophy of Race by Thomas Metcalf

Removing Confederate Monuments by Travis Timmerman

Applied Ethics by Chelsea Haramia

저자 소개

빅터 파비안 아분데즈-게라(Victor Fabian Abundez-Guerra)는 캘리포니아 엘카혼에 있는 그로스몬트 대학(Grossmont College)의 철학 조교수입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인종 철학과 도덕적 책임의 교차점에 있습니다. UC 리버사이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논문 제목은 ‘억압에 대한 집단적 책임: 국가의 사과와 기타 관행에 대한 이해”(Collective Responsibility for Oppression: Making Sense of State Apologies and Other Practices.)입니다. 그의 논문은 Public Philosophy Journal, Teaching Philosophy 및 기타 포럼에 실렸습니다. VAbundezGuerra.org

네이선 노비스(Nathan Nobis)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모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 철학 교수입니다. Animals & Ethics 101의 저자이자 Thinking Critically About Abortion의 공동 저자, Chimpanzee Rights의 공동 저자이며, 그 외 철학과 윤리학 분야의 많은 논문, 책, 리뷰의 저자 또는 공동 저자입니다. NathanNobis.com


이 글은 Victor Fabian Abundez-Guerra와 Nathan Nobis의 Responding to Morally Flawed Historical Philosophers and Philosophies를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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