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논쟁은 단순히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 Eric Heinze

콘라드 랜딘(Conrad Landin)은 2013년 《가디언》(The Guardian)에 이렇게 썼다. “누군가 편견, 인종차별 또는 강간과 같은 사회적 해악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는 연사를 초청하는 것의 무신경함을 지적할 때마다 항상 같은 방어 논리가 제시된다. 바로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다.” 언론인이자 활동가인 랜딘은 프랑스의 극우파 정치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케임브리지 대학 토론 모임에서 연설하도록 한 논란이 많았던 초청에 반대하고 있었다.

대학 내에서 뿐 아니라 그 바깥에서도 이것은 오래된 논쟁이다. 물론 논쟁의 주역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져 왔다. 수세기 동안, 검열은 군주제, 귀족제, 교회의 반동적 세력들의 전유물이었다. 표현의 자유가 위협한 것은 권력의 독점이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렇다.) 자유주의는 이에 맞서 싸웠다.

무대 왼쪽에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등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의 이 전통적 역할을 뒤집어 놓았다. 한때 엘리트 권력에 맞서는 확고한 세력으로 여겨졌던 자유주의는 이제 가장 강력한 엘리트주의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계급 분열은 단지 구엘리트를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 후자(=새로운 엘리트)는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화—순전히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주의가 직접 인용되지 않을 때조차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이끌어 왔다. 극우와 극좌의 양극단 진영에서는 자유주의가 정치적 기득권에 맞서는 선봉대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서서히 그리고 은밀하게 스스로가 기득권의 전형이 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보편적인 개인의 자유라는 신화는 총체적 권력에 맞서는 방어벽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것에 동화된다. 제한 없는 공개 담론은 자유를 보호하는 성역이 아닌 자유의 적이 된다. 그것은 소외된 목소리를 증진하기보다는 그들을 계속 소외된 채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르펜 여사의 케임브리지 데뷔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그것의 무분별한 영속화에 기여한다.

오늘날 표현의 자유 논쟁에서 주된 분열은 자유의 도구로서 제한 없는 표현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계급 특권의 도구로 폭로하는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균열은 단지 한 가지 이야기만을 말해줄 뿐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류 자유주의 학설들은 도발적 표현에 대한 제한을 압도적으로 요구한다. (미국은 자주 비판 받는 유일한 예외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은 대체로 합법적 표현과 불법적 표현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단지 그 경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의견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보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이익 균형'(balance of interests) 접근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훨씬 더 선명한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등장했다. 강경한(하지만 여전히 소수인) 자유지상주의자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그 경계선을 완전히 없애 버리려 한다. 이에 대해 급진주의자들은 주류 자유주의의 경계 설정에 반대하기보다는 단지 특정 유형의 표현에 대해 경계선을 더 엄격하게 그으려 한다. 다른 철학이나 언어를 채택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그들(=급진주의자들)은 원칙이 아닌 정도의 문제에서만 자유주의자들과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표현을 제한하는 선을 긋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한편, 일부 강력한 급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의 보편주의적 가식을 해체하여, 그것이 그 반대, 즉 계급 고착화와 배제를 위한 전략이라고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미 그 동일한 자유주의적 열망을 더 낙관적인 시각에서 해체했다. 구체제(the ancien régime)[역주1]는 자유주의자들 안에 낡은 귀족제의 안일한 권력 구조보다 더 예리한 독창성을 불어넣음으로써 형식적 평등의 환상을 넘어서게 한다. 이것이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작동 방식이다. 이는 좌파에 대한 좌파적 비판 시도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격분시키는 말』(Excitable Speech, 1997)[역주2]에서 암묵적으로 다시 등장한다(버틀러는 실제로 경력의 초기에 헤겔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류 급진주의가 혐오 발언이 사회정치적으로 약자인 집단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고착화한다고 단정하는 반면, 버틀러는 그러한 억압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을 그 집단의 정치적 각성과 결집을 일으키는 자극제로 본다.

나는 현대 비판 이론을 그 높은 위치에서 끌어내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헤겔주의 샐러드에 포스트모던 소스를 얹었음에도 불구하고, 버틀러의 논제에서 영미 자유주의의 낡고 진부한 옹호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 1869)[역주3] 2장에 제시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요소를 단 하나라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신랄한 반(())자유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조차도 검열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밀만큼 오래되었고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한 전통은 표현의 자유의 효능을 시장의 자유의 효능과 결부시켰다. 이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시장의 나쁜 상품에 대한 해결책은 더 많은 좋은 상품이고, 나쁜 발언에 대한 해결책은 ‘더 많은 발언‘이다. 표현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의 연결은 좌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진실이어서 문제가 된다. 상품 시장은 계급 분열을 극복하는 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경쟁의 필연적 산물로 그것을 확정하고 정당화한다. ‘사상의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허한 형식적 평등을 모두에게 보장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에 유리하고 힘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불리하도록 체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책이 나오고 6년 후, 프랑스어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노련한 대변인인 라울 바네겜(Raoul Vaneigem)은 핵심 좌파 교리에 대해 유사하게 급진 좌파적(arch-leftist) 논박을 했다. 자유주의가 상품과 사상의 시장을 결부시켜서 규제에 반대하고, 급진주의적 비판은 그것들을 결부시켜서 규제를 지지하는 반면, 바네겜의 전략은 그것들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Rien n’est sacré, tout peut se dire, 2003)에서 이 상황주의 철학자는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는 신자유주의 시장 세력의 상품화된 획일성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것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라고 주장한다. 시장의 가짜 자유(pseudo-freedom)와 달리, 공개 담론은 진정한 자유다. 그것은 창조적으로 기성 엘리트 권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자유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도 시민 기반 민주주의에 대해 유사한 견해를 지지한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 논쟁을 어렵게 만드는 교착 상태와 반복을 피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자유주의적 입장’이 항상 한 가지 결론을 요구하고 ‘급진적 입장’이 다른 결론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두 접근법 모두 공개 담론에 대한 제한을 지지하는 그럴듯한 정당화를 제공하고, 그에 반대하는 더욱 강력한 근거도 제공한다.

2017. 1. 5.


저자 소개

에릭 하인즈(Eric Heinze)는 런던 퀸 메리 대학교(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의 법학 및 인문학 교수다. 그의 최신 저서는 『혐오 발언과 민주적 시민권』(Hate Speech and Democratic Citizenship, 2016)이다.


역주

[1] 앙시앙 레짐(the ancien ré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정치 체제를 가리키는 말. 절대왕정과 귀족 중심의 사회 구조를 말한다.

[2] 번역본: 유민석 역,『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알렙, 2022.

[3] 번역본 1: 존 스튜어트 밀, 김형철 역,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광사, 2008.
번역본 2: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역, 『자유론』, 책세상, 2018.
번역본 3: 존 스튜어트 밀, 박문재 역, 『자유론』, 현대지성, 2018.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Free speech debates are more than ‘radicals’ vs ‘liberals’을 번역한 것입니다.
Aeon의 번역 및 배포 기준을 준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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