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표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투표하는 것은 합리적일까? – Julia Maskivker

너무나 오랫동안, 정치학자들은 투표에 있어 개인의 이해관계와 사회의 이해관계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통념으로 받아들여 왔다. 미국의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는 그의 고전적인 저서 An Economic Theory of Democracy (1957)(한국어 번역본: 『경제 이론으로 본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3.)에서, 자신의 한 표가 선호하는 후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과를 바꿀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아는 진정으로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굳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행위자 자신에게 어떤 도구적 가치도 없는 독립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어리석은 것이며, 오직 그 행위가 자신에게 자부심을 주거나 타인과의 유대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것은 전문적인 논증으로서는 괜찮고, 심지어 설득력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인 설명을 논리적 극단까지 밀고 가면, 누구도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민주적 통치체제의 핵심적인 조절 메커니즘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각 시민이 투표소에 가는 데 드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는 더 나빠지게 될 것이다. 고전적 관점은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선거는 궁극적으로 협력적인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투표 참여의 합리성에는, 단순히 투표기 레버를 당기거나 투표용지에 표시하는 데 드는 노력에 대한 개별적인 비용 편익 분석보다 더 많은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투표에서 가지는 진정한 이해관계는 전체로서의 정치적 조직체의 이해관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점에서 투표는 다른 많은 행위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집단적 노력(collective endeavour)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기본적 이익에 반하는 결과에 기여할 위험이 있을 때마다,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 극심한 빈곤, 예방 가능한 질병 등 다양한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개인이 자신의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거나 아동 노동을 착취하는 기업을 개별적으로 불매하기로 결정하는 것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어떤 개인도 개별적으로 기후 위기를 해결하거나 아동 착취를 근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 행위를 통해 인류 전체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적 노력(collective effort)에 기여하는 것은 여전히 합리적이다.

이러한 합리성의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를 포함한 전체에 좋은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미약하게나마 그것에 기여할 수 있을까? 이 관점은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개별 행동을 취할 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협력하는 각 사람에게 돌아가는 집단적 이익(collective benefit)은 각 개인이 자신의 몫으로 부담하는 비용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선거의 맥락에서 집단적 노력(collective endeavour)은 정의로운 정부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이 목표에 개인적으로 기여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매우 적다. 투표는 등록 및 투표 절차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우리 삶에 제한적인 불편만을 가져오는 일회성 행위이다. 그리고 집단적 이익(collective interest)을 가장 잘 실현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가 누구인지 판단하기 위해 충분한 사실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한 일이 아니다. 완전한 민주주의의 지지자는 아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Politics)에서 시민들이 시민 생활에 참여하기 위해 고도의 전문성을 갖출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투표에는 일정 수준의 지식이 필요하지만, 특출나거나 깊이 있는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권자의 무지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에 대한 접근성과 시민 교육을 강화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도덕한 정치 계급의 의식적인 기만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투표의 의무는 곧 책임감 있게 투표할 의무이다. 이것은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권자의 무관심과 무지를 민주주의의 모든 문제의 주범으로 보기보다는 그것들을 초래한 원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선거를 통해 공정한 정부를 선출하거나 적어도 무능하고 비도덕적인 정부를 축출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동료 시민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투표를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의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즉 우리가 집단적 이익(collective benefit)을 달성하기 위해 모두 함께 행동할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이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대의 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에서 투표를 신탁(信託)으로 특징짓고, 그것이 각 시민에게—“유권자로서든 대표자로서든”—사회의 다른 시민들에 대한 권력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밀이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의 투표가 선거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언급한 ‘권력’은 집단적인(collective) 것이면서 개별적 행위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개개인의 투표는 함께 모여 정부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협력이 선호할 만하지 않는 상황이 있을까?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두 번째 논고』(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1689)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집단적으로 복종하며 타인과 협력하는 것보다 자연 상태에서의 삶을 선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투표도 이와 비슷할까? 개인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있을까?

내 생각에 그런 시나리오는 없다.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1972년에 제시한 예시를 사용하자면, 우리가 만약 연못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이를 물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죽음에 인과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투표하지 않기로 한 개인의 결정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결정과 결합되어 불의한 정부가 계속 집권하게 하거나 정의로운 정부가 수립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려 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 볼 이유는 없다. 이는 우리가 재활용을 하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이 비합리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이 투표할지 여부를 알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이 투표할 것이라 가정하고 행동해야 하며, 그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투표의 도덕을 뒷받침하는 집단적 노력(collective commitment)의 논리이다.

집단적 합리성(collective rationality)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무임승차의 유혹—즉, 집단적 이익(collective benefit)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공정한 몫을 다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성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 공동선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하며,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그들의 삶과 다른 목표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도의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이 “품위 있는 행동에 대한 관심”이라고 부른 것이 그들을 움직이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도덕은 우리에게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보에 입각한 투표를 하는 것은 영웅적이거나 성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우리 중 대부분에게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을 돕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택 사항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타인을 향한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행동이든—그것이 단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는 약간의 추가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도덕적으로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 집착한다면, 투표의 도덕에 대한 합의는 영원히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개선하려는 다른 많은 방식들의 도덕에 대한 합의도 마찬가지이다. 시민들이 너무 안일해서 자신을 포함한 집단의 선(collective good)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려는 사회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저자 소개

줄리아 매스키브커(Julia Maskivker)는 플로리다에 위치한 롤린스 칼리지(Rollins College)의 정치학과 부교수입니다. 그녀는 윤리와 정치 이론, 특히 정의와 평등 이론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아실현과 정의』(Self-Realization and Justice, 2012), 클라우디오 로페즈-게라(Claudio Lopez-Guerra)와 공동 편집한 『합리성, 민주주의, 정의』(Rationality, Democracy, and Justice, 2014), 그리고 『투표의 의무』(The Duty to Vote, 2019)의 저자입니다.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Given how little effect you can have, is it rational to vote?을 번역한 것입니다.
Aeon의 번역 및 배포 기준을 준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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