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포드의 믿음의 윤리학은 이 부정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증거주의입니다. – Helen De Cruz

윌리엄 클리포드(William Clifford, 1845~1879)는 낮에는 수학자였고 밤에는 철학 저술을 했습니다(슬프게도 그는 33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의사들은 그것이 과로 때문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기하학적 대수학(geometric algebra)에 기여했으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예견하고, 비유클리드 기하 공간으로서 타원 공간 기하학(elliptic space geometry)을 정교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윌리엄 클리포드는 주로 그의 에세이 “믿음의 윤리학”(“The Ethics of Beliefs“, The Contemporary Review, Dec 1, 1876, vol 29)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세이를 주로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제임스는 클리포드를 비판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이 요약된 그의 입장(클리포드 자신이 공식화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무엇이든 믿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잘못된 것이다.”

–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철학 수업 시간에는 제임스의 독해를 바탕으로 클리포드의 증거주의는 비현실적이고 명백히 틀렸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증거주의(Evidentialism)는 믿음이 증거에 의해 인도되고 제약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증거주의에는 더 강한 버전과 약한 버전이 있습니다. 강한 버전은 클리포드의 원칙(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무엇이든 믿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잘못된 것이라는 원칙)입니다. 약한 버전은 ‘반대 증거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믿음을 기꺼이 수정해야 한다’, 또는 ‘증거에 열려 있는 것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클리포드 자신의 논증이 약한 버전의 증거주의를 지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는 클리포드의 글을 살펴보고 평가해 보고자 합니다. 클리포드를 새롭게 읽어보면, 우리는 클리포드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편리한 것을 믿고, 소망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증거 없이 믿고, 자료를 교차 검증하지 않는 것의 파괴적인 힘을 예견하고, 이것이 어떻게 자신뿐만 아니라 더 넓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지 내다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낡고 결함이 있는 배에 승객을 태우고 대서양 횡단 항해를 떠나보내는 한 선주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스스로를 안심시켜 배에 문제가 없다고 믿은 다음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보험금을 챙겼[습니]다.” 이 사고 실험을 생생하게 묘사한 나레이션을 게임 The Witness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사례는 원죄를 믿지 않는 종교인 집단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린 선동가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선동가들은 “그들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선동가들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과 편견에 근거한 주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해악을 끼친 것입니다.

클리포드는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도, 증거에 근거하여 믿음을 형성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오직 그 사람 자신과만 관련된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사회가 사회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세상사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의해 인도된다. 우리의 말, 표현, 행동 양식과 과정, 그리고 사고방식은 공동의 자산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고 완성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좋든 나쁘든, 동료들에게 말을 하는 모든 사람의 모든 믿음이 엮여 있다. 우리가 후세가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무서운 특권이자 책임이다.

–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클리포드는 우리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진 인식적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담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친 개인주의, 즉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는 통념을 부정했습니다.

클리포드는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매혹적으로 여기는 가짜 뉴스, 헛소리, 기타 거짓의 확산을 전염병의 확산에 비유하는데, 이는 오늘날에 적절해 보이는 비유입니다.


그 의무는 곧 우리 몸을 지배하고 마을 전체로 퍼질 수 있는 전염병과 같은 [거짓] 믿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달콤한 과일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족과 이웃에게 전염병을 가져올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우리는 증거에 근거해 잘 알고 있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성품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클리포드는 자신의 열정과 소망적 사고에 근거해 믿으면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감염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나중에 덕 인식론이 될 것에 대한 흥미로운 예견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는 전문가나 큰 플랫폼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모든 소박한 사람은 자신의 종족을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미신을 죽이거나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모든 열심히 일하는 장인의 아내는 자신의 자녀에게 사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믿음을 전달할 수도 있고, 사회를 산산조각 내버릴 믿음을 전달할 수도 있다.

–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믿음의 윤리학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참인 믿음에 기초하고 시민들이 진리를 높이 평가하는 사회는 결속력이 있는 반면, 사람들이 변덕과 편의에 따라 믿고 진리를 경시하는 사회는 분열되고 에코 챔버(역주: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믿음과 의견만 접해서 기존 생각이 강화되고 다른 의견은 고려되지 않게 되는 환경을 말함) 속으로 빠져들 위험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증거주의는 어렵고 클리포드는 이를 충분히 인정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증거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어떤 생각은 우리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살아 있는 선택지가 아닌—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클리포드에게 증거주의는 어렵지만 살아 있는 선택지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취약하게(vulnerable) 만듭니다. 우리가 얻는 관련 증거가 바뀌면 우리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무는 어려운 것이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의심은 종종 매우 쓰라린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안전하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우리를 벌거벗고 무력하게 만든다. 어떤 것에 대해서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을 잃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때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훨씬 더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느낀다.

– 클리포드, ‘믿음의 윤리학’

증거주의의 엄격함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클리포드는 C.S. 퍼스(C.S. Peirce) 같은 실용주의자처럼 들리는데, 퍼스 역시 믿음은 우리가 의지하는 행복한 기본 상태이며 의심은 우리를 행동하고 재고하게 만드는 불쾌한 상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적 의무를 수행하려면 의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척하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의 취약성에 대한 클리포드의 논의에 많은 공감을 느낍니다. 클리포드는 이어서 “지식에 대한 감각(sense of knowledge)에 부여된 힘의 감각(sense of power)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싶게 만들고 의심하기 두려워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클리포드는 제대로 뒷받침되는 지식은 위대하고 소중한 자산이지만, 불충분한 증거에 근거해 믿는 것은 도둑질한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제대로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공공선에 기여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지식]이 공동의 자산이며,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정당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근거에 기반한 믿음이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더 넓게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 뒷받침된 믿음은 더 넓은 혜택을 가져다줍니다.

전통은 어떨까요? 그것 역시 의심해야 할까요? 클리포드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것은 가능하고 옳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전통의 주된 목적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물을 시험하고 탐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클리포드는 다시 한 번 제인 애덤스(Jane Addams)와 존 듀이(John Dewey) 같은 실용주의자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클리포드의 에세이는 우리가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증거 자체에 접근할 수 없는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소 만족스럽지 않은 의견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서는, 고차 증거(higher-order evidence)(전문가들로부터 얻는 증거)에 대해 논의하는 데이비드 크리스텐슨(David Christense)과 같은 저자들의 작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클리포드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사용가능한 백신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졌고, 이로 인해 제가 있는 주(미주리)의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있습니다. 음모론이 만연한 세상에서 증거주의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분명 클리포드의 원칙(언제나, 어디서나 … 잘못된 것이다)은 너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약한 증거주의 원칙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믿음(예: 질병에 관한 것)에 대해 최소한의 숙제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자신을 의심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존경과 칭찬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저자 소개

헬렌 드 크루즈(Helen De Cruz)는 세인트루이스 대학교(Saint Louis University) 인문대학의 댄포스 석좌교수(the Danforth Chair)입니다. 그녀는 Wonderstruck: How Awe and Wonder Shape the Way We Think (Princeton University Press, in press), Religious Disagreement (Cambridge University, 2019)의 저자이며, Philosophy Illustrated: Forty-Two Thought Experiments to Broaden Your Mind (Oxford University Press, 2022)를 편집하고 삽화를 그렸습니다. 철학 박사 학위(2011, University of Groningen) 외에 고고학 및 예술 과학 박사 학위(2007, Free University of Brussels)를 취득했습니다.


이 글은 Helen De CruzClifford’s Ethics of Belief is the evidentialism we need in these denialist times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고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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