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부 세계 회의주의와 그 동기에 대한 소개
주변 환경을 살펴보라. 이쪽저쪽 고개를 돌려서 주변의 모든 것을 충분히 관찰하라. 편의를 위해 변항(variable)을 하나 도입하자.
사물들이 당신에게는 P처럼 보인다.
여기서 P는 당신이 주변을 바라볼 때 사물이 당신에게 어떻게 보였는지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다. 사물이 당신에게 P처럼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당신에게는 자명하다. 당신은 사물이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특별한 접근 권한을 가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 상황 가운데 어떤 것이 ‘당신에게 P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의해 더 잘 뒷받침될까? 다시 말해, 다음 중 어떤 것이 더 잘 정당화되는가?
(1) 사물들은 실제로 P이다.
(2) 당신은 지금 매우 강력한 악령에게 속고 있다. 이 악령은 당신 감각 인상을 조작할 능력이 있어서, 실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진짜인 것처럼 경험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사물들은 실제로는 전혀 P와 같지 않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는 자신이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 안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1)이 참이라면, 당신은 실제로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에 있으면서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만약 (2)가 참이라면, 당신은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에 있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고 있지도 않다. 만약 (2)가 참이라면, 사물들은 당신에게 보이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1]
철학자들은 (2)와 같은 경우를 회의주의적 시나리오(skeptical scenario)라고 부른다.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서 당신은 당신이 가진 증거에 의해 근본적으로 잘못 인도되고, 속고, 현혹당한다. 그래서 사물이 당신에게 보이는 방식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철학사에서 회의주의적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성찰』(1641)을 쓴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1596-1650)일 것이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 그리고 위의 우리 시나리오 (2)에서처럼 악령에 의해 속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 할리우드는 『토털 리콜』(Total Recall, 1990), 『매트릭스』(The Matrix, 1999), 『인셉션』(Inception, 2010)과 같은 영화들에서 회의주의적 시나리오를 많이 활용했다.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1)과 (2) 중 어느 것이 ‘당신에게 P처럼 보인다’는 것에 의해 더 잘 뒷받침되거나 정당화되는가? 만약 당신이 스스로에게 정직하다면, 사물이 보이는 방식(how things seem)은 (1)과 (2)를 동등하게 잘 뒷받침한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당신의 내적이고 1인칭적인 관점에서, 사물이 당신에게 보이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1) 또는 (2) 중 어느 것도 참일 수 있다. 여기서 핵심 문제가 등장한다. 만약 (1)과 (2) 모두가 당신의 증거에 의해 동등하게 잘 뒷받침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몸 밖에 있는 세계에 관해 무엇이든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이 외부 세계 회의주의의 문제이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 인식론의 중심 문제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회의주의적 논증들을 처음 접할 때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거나 웃어넘기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 논증들의 힘을 이해하기 바란다. 회의주의적 논증의 핵심은 단지 외부 세계에 대해 우리가 틀릴 희박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물이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엄청나게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사물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믿을 좋은 이유가 없다면, 당신이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에서 컴퓨터를 보며 21세기 지구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단순한 독단에 불과하지 않은가?
2. 외부 세계 회의주의에 대한 두 가지 대응[2]
유명한 상식의 옹호자인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토마스 리드(Thomas Reid)(1710-1796)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가 참이라고 믿을 적극적 이유(positive reason)가 없다면, 상식(common sense)이 인식론적 저울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속고 있지 않다’는 결론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와 유사하게, 최근의 여러 철학자들은 마이클 휴머(Michael Huemer)(2001)를 따라서 현상적 보수주의(Phenomenal Conservatism)로 알려진 인식론적 원리를 옹호해 왔다. 이 원리는 파기자(defeaters)(즉, 우리의 정당화를 무효화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것들)가 없다면, 세계가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3] 이 입장은 본질적으로 리드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회의주의적] 시나리오들을 고려할 충분하고 적극적인 이유가 없다면 회의주의적 시나리오들의 가능성이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없다. 리드와 휴머의 이론 모두 일종의 정당화의 관성(justificational inertia)에 의존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즉, 우리의 기본적인 인식적 입장은 정당화되어 있으며, 이 정당화를 파괴하거나 의문시하려면 적극적인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철학자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여 왔다. 회의주의 철학 학파의 창시자인 그리스 철학자 엘리스의 피론(Pyrrho of Elis)(기원전 약 360-270년)에 따르면, 지식은 불가능하다(피론의 저작들은 모두 실전되었다. 우리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기원후 약 160-210년)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학설들을 안다). 피론은 심지어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아카탈렙시아(acatalepsia) 학설이며, 철학자들이 총체적 회의주의(global skepticism)라고 부르는 것의 한 형태이다(총체적 회의주의는 지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단순한 외부 세계 회의주의보다 더 극단적이다). 피론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들의 참된 본성을 결코 알 수 없으며, 설령 우리가 우연히 세계에 대해 정확한 무엇인가를 믿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잠시나마 진리에 우연히 닿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다. 이 학설이 누군가에게는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회의주의자들은 이 학설을 해방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식에 대한 헛된 욕심을 포기함으로써, 피론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타락시아(ataraxia), 곧 마음의 평정 상태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3. 결론
우리의 주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주제로 한 논의는 정당화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만약 휴머의 현상적 보수주의 원리와 같은 어떤 방법으로 정당화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어떤 지식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또는 지식이 가능한지를 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때는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걱정하지 않기 위해 회의주의자들의 유사 종교적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주석
[1] 만약 악령 시나리오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꿈을 꾸고 있거나 환각을 보고 있거나, 또는 심지어 실험실에서 당신의 시각 피질이 전극에 의해 자극받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2]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은 회의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자 수만큼이나 많다. 여기서는 분량 제한으로 인해 단지 두 가지만 제시했다. 다른 흥미로운 대응들에 대해서는 DeRose & Warfield (1999)를 참조하라.
[3] Tucker (2013)에서 툴리(Tooley)와 휴머(Huemer)가 논의했듯이, 현상적 보수주의에 대한 이 정식화는 사실 너무 성급하다. 보다 신중한 정식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 S에게 P처럼 보인다면, 파기자들(defeaters)이 없는 한, S는 그로써 P에 대한 어느 정도의 초견적(prima facie) 정당화를 얻는다.
참고문헌
Descartes, René.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In Which the Existence of God and the Distinction of the Soul from the Body Are Demonstrated. Ed. Donald A. Cress. Indianapolis: Hackett Pub., 1993.
번역본 1: 이현복 역,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 문예출판사, 2021. (권장)
번역본 2: 최명관 역, 『데카르트 연구 – 방법서설ㆍ성찰』, 창, 2010.
번역본 3: 양진호 역, 『성찰』, 책세상, 2020.
Huemer, Michael. Skepticism and the Veil of Perception.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2001.
Reid, Thomas. Thomas Reid’s Inquiry and Essays. Ed. Ronald E. Beanblossom and Keith Lehrer. Indianapolis: Hackett Pub., 1983.
번역본: 양선숙 역, 『인간 마음에 관한 탐구』, 한길사, 2014.
Vogt, Katja. “Ancient Skeptic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24 Feb. 2010. Web. 03 Feb. 2014. <http://plato.stanford.edu/entries/skepticism-ancient/>.
번역본: 신우승 외 역, 『고대 회의주의』, 전기가오리, 2018.
관련 에세이
Descartes’ “I think, therefore I am” by Charles Miceli (번역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지식의 토대에 대한 르네 데카르트의 견해)
Descartes’ Meditations by Marc Bobro
Pyrrhonian Skepticism: Suspending Judgment by Lewis Ross (번역본: 피론학파의 회의주의: 판단을 유보하기)
Moore’s Proof of an External World: Responding to External World Skepticism by Chris Ranalli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by Thomas Metcalf (번역본: 인식론, 또는 지식 이론)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by Todd R. Long (번역본: 인식적 정당성: 합리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Seemings: Justifying Beliefs Based on How Things Seem by Kaj André Zeller
Modal Epistemology: Knowledge of Possibility & Necessity by Bob Fischer
The Gettier Problem and the Definition of Knowledge by Andrew Chapman (번역본: 게티어 문제와 지식의 정의)
저자 소개
앤드루 채프먼(Andrew Chapman)은 콜로라도대학교 볼더 캠퍼스(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철학 강사이다. 그는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노던일리노이대학교(North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이타카대학(Ithaca College)에서 철학 학사 학위(BA), 그리고 바순/음향녹음기술 음악 학사 학위(BM)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인식론, 메타윤리학, 그리고 철학사(특히 칸트와 20세기 영미철학 및 현상학 전통)이다. 철학을 하지 않을 때는 스키나 하이킹을 즐기고 좋은 음악을 듣거나 바순을 연주한다.
이 글은 Andrew Chapman의 External World Skepticism을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