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 화면이나 종이를 보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나는 손에 종이를 들고 있다.’, ‘나는 컴퓨터 앞에 있다.’ 또는 각자 상황에 맞는 어떤 생각이든 좋다.
이런 믿음은 확실한가? 이렇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믿음이 거짓일 가능성은 없을까? 착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믿음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믿음들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한 가지만은 분명한 예외라고 주장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바로 그것이다.[1] 그는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는 믿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철학에서 이 구절보다 유명한 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코기토(Cogito)’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라틴어 원문 구절인 cogito ergo sum에서 따온 것이다.[2]
이 글은 코기토의 의미, 데카르트에게서 그것이 갖는 중요성, 그리고 오늘날까지 철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1. 의심과 회의주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구절은 『방법서설』(1637)에 처음 등장한다.[3]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1641)(줄여서 『성찰』이라고 불린다.)에서는 표현을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로 바꾸었다.[4][5]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지금껏 많은 거짓 믿음들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참인 믿음만을 갖도록 보장하는 방법을 찾고, 더 나아가 과학 연구 역시 오직 진리만을 산출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의 전략은 거짓이거나 거짓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주장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 감각이 그를 속인 적이 있으므로, 지금도 감각이 그를 속이고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전에 잘못 추론한 적이 있으므로, 지금도 잘못 추론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감각에 근거한 모든 믿음과 추론 능력에 근거한 모든 믿음을 의심한다. 이런 믿음들이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데카르트는 가장 극단적인 의심의 근거를 고려한다. 그의 모든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속여 무엇이든 믿게 만드는 악령(때로는 ‘정령’, ‘요정’, ‘영혼’으로 번역됨)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6] 데카르트는 이런 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정신 밖의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믿음이 악령이 만들어 낸 환상이고, 실제로는 아무것에도 대응하지 않아서,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모든 믿음이 거짓일 가능성을 인정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회의주의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회의주의란 우리에게 지식이나 정당화된 믿음이 없다는 견해다.[7] 여기서 회의주의가 고려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확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믿는 것이 거짓일 수도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통해 회의주의를 물리치고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코기토와 확실성
악령의 가능성을 고려한 후, 데카르트는 곧 코기토를 발견한다. 그는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악령 가설의 시험을 이겨 낸다는 것을 깨닫는다! 설령 데카르트가 검토하는 믿음들과 믿음의 유형들이 모두 거짓이거나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해도, 최소한 속임을 당하려면 그는 존재해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해도, 의심하는 그 순간에는 존재해야만 한다. 의심을 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심은 생각의 한 방식이고, 의심하거나 생각하려면 우선 존재해야 한다. 의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코기토에서 ‘나는 생각한다.’ 부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확실한 지식을 함축한다. 생각은 생각하는 자를 필요로 하고 이것은 확실하게 알려진다. 아무리 악령이라 해도 존재하지 않는 자를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적어도 하나의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으며 반박할 수 없는 지식을 말이다.[8]
3. 회의주의의 극복
코기토를 발견한 후, 데카르트는 이것이 다른 확실한 진리들을 찾는 방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인 이유는 그것이 명석판명(clear and distinct)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명석함에 대해 데카르트는 “어떤 지각들은 너무 명백하고 동시에 너무 단순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참이라고 믿지 않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9]고 설명한다. 어떤 것이 판명할 때 정신은 그 대상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명확하게 본다. 데카르트는 이런 특성들을 다른 모든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데카르트는 코기토에서 끌어낸 명석판명성 규칙이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명석판명성 규칙 자체는 무엇이 보증하는가?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라고 답한다. 자신이 가진 신에 대한 관념을 반성함으로써 그는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0] 이어서 데카르트는 진실하고 선한 신이라면 우리가 대상들을 명석판명하게 이해할 때 속임을 당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거짓 믿음을 갖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코기토는 서로를 바탕으로 쌓아 올려지는 일련의 주장들의 토대가 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의 추론은 그가 처음에 의심했던 것들을 실제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음을 보여준다.[11] 이렇게 해서 그는 앞서 고려했던 회의주의적 우려를 극복한다.
4. 결론: 확실성 없는 지식
데카르트는 코키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확실하고, 따라서 그것을 믿을 때 거짓일 수 없는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앎(=지식)이 되려면 확실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행히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을 궁극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그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를 부정했다.
현대 지식 이론가들은 지식에 확실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오류가능주의자들(falliblists)”인데, 오류가능주의란 우리가 어떤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는 못하면서도 그것을 알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13] 데카르트의 지식 기준이 갖는 문제는 그 기준을 충족하는 믿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일상적 지식 주장들이 궁극적으로 코기토에 기반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의 논증에 설득되지 않았다.
코기토의 인식론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만약 확실성이 지식의 필요조건이라면 우리에게는 실제로 지식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확실성이 지식에 필요하지 않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14]
주석
[1] 데카르트의 『성찰』 전체에 대한 논의는 마크 보브로(Marc Bobro)의 Descartes’ Meditations 1-3과 Descartes’ Meditations 4-6을 참조하라.
[2] cogito ergo sum에 표현된 생각은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의 것으로 여겨지고 그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지만,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보다 1,000년도 더 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11권 26장)에서 “ergo sum si fallor.”라고 썼는데, 이는 종종 fallor ergo sum, 즉 ‘나는 실수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의역된다.
[3]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AT VI 32: CSM I 127).
[4]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성찰』로 넘어가면서 표현을 바꾼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방법서설』과 달리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엄격한 의심의 방법으로 믿음을 시험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한 추론조차 의심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코기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찰자는 논리 자체가 신뢰할 만한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전제들로부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적법하게 논증할 수 없다. 『성찰』의 코기토에서 ergo가 빠진 것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가 다른 믿음들에 대한 정당화를 제공하고 지식을 근거짓기 위한 토대적 믿음을 찾고 있었는데, 믿음이 적절히 토대적이려면 그 자체로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5]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AT VII 25: CSM II 17).
[6] 1999년의 공상과학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는 이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들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매트릭스에 의해 야기될 수 있고, 그러한 믿음들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에 ‘연결된’ 누군가가 자신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실제로는 자전거를 타고 있지 않으므로 그 믿음은 거짓이다.
[7] 회의주의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회의주의자들은 ‘총체적(global)’ 회의주의자로서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지식도 전혀 없다고 본다. 데카르트는 적어도 코기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총체적 회의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다른 종류의 회의주의는 더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미래에 관한 지식 주장에 대한 회의주의자(‘아무도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종교적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자, 도덕적 지식에 대한 회의주의자, 증언에 기반한 지식 주장에 대한 회의주의자 등이 있다.
[8] 코기토의 확실성에서 따라오는 것은 데카르트 자신의 본성이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코기토는 데카르트에게 몸이나 뇌가 있다는 것, 심지어 다른 정신들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증명해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의심될 수 있다. 오직 생각만이 확실하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인가? 내가 생각하는 동안이다. 만약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아마도 즉시 존재하기를 완전히 멈출 수도 있을 것이다.”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AT VII 27: CSM II 18).
[9]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AT 7, 145-6, CMS 2, 104).
[10] 데카르트는 자신이 가진 신 관념이 오직 신에 의해서만 야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스스로 그 관념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고 자신의 어떤 경험들로부터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또한 신의 존재에 대한 독립적인 논증인 존재론적 논증도 제시한다. 앤드루 채프먼(Andrew Chapman)의 The Ontological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을 보라.
[11] 따라서 데카르트는 명백히 토대론자이다. 예를 들어 Hasan, Ali, “Foundationalist Theories of Epistemic Justification,” in E. N. Zalta (ed.),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8 edition.을 보라.
[12] 각 개인이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데카르트가 했던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지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데카르트(또는 누군가, 또는 충분한 수의 사람들)가 이런 성찰을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지식를 갖는 것에 기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3] 예를 들어 Unger, Peter. Ignorance: A Case for Scepticism (Oxford, UK and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Chapter III을 보라.
[14] 확실성이 지식에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지식 이론들이 직면하는 몇 가지 도전에 대한 논의는 앤드루 채프먼(Andrew Chapman)의 The Gettier Problem(번역본: 게티어 문제와 지식의 정의)과 토드 R. 롱(Todd R. Long)의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번역본: 인식적 정당성: 합리적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보라.
참고문헌
St. Augustine, The City of God (412)
번역본 1: 성염 역,『신국론 1,2,3』, 분도출판사, 2004.
번역본 2: 조호연, 김종흡 공역,『하나님의 도성』,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6.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Cottingham, John, Robert Stoothoff, and Dugald Murdoch.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ume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Hasan, Ali, “Foundationalist Theories of Epistemic Justification,” in E. N. Zalta (ed.),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8 edition.
Unger, Peter. Ignorance: A Case for Scepticism (Oxford, UK and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Chapter III.
관련 에세이
Descartes’ Meditations 1-3 by Marc Bobro
Descartes’ Meditations 4-6 by Marc Bobro
al-Ghazālī’s Dream Argument for Skepticism by John Ramsey
Epistemology, or Theory of Knowledge by Thomas Metcalf
External World Skepticism by Andrew Chapman
Pyrrhonian Skepticism: Suspending Judgment by Lewis Ross
The Gettier Problem and the Definition of Knowledge by Andrew Chapman (번역본: 게티어 문제와 지식의 정의)
Epistemic Justification: What is Rational Belief? by Todd R. Long (번역본: 인식적 정당성: 합리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Seemings: Justifying Beliefs Based on How Things Seem by Kaj André Zeller
The Ontological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by Andrew Chapman
Modal Epistemology: Knowledge of Possibility & Necessity by Bob Fischer
감사의 말
편집진은 이 글을 검토해 준 마크 보브로(Marc Bobro)에게 감사합니다.
저자 소개
찰스 미첼리(Charles Miceli)는 뉴저지와 아시아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포드햄 대학교(Fordham University)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여가 시간에는 소설을 읽는다. micelicharles @ yahoo.com
이 글은 Charles Miceli의 “I think, therefore I am”: René Descartes on the Foundations of Knowledge를 번역한 것입니다.
1000-Word Philosophy 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