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슈비츠게벨(Eric Schwitzgebel)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철학과
서론
최근 철학계에서 믿음에 대한 지배적 모델은 아마도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일 것이다. 나는 이와 경쟁하는 모델인 성향주의(dispositionalism)를 지지한다. 이 글에서는 두 견해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대조적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는 심리학 및 인지과학의 연구자들에게 유의미한 이론적·방법론적 함의도 포함된다.
표상주의 대 성향주의: 정의
표상주의에 따르면, 어떤 명제 P(예를 들어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거나 ‘남성과 여성은 지적으로 동등하다’는 명제)를 믿는다는 것은 P라는 내용을 가진 표상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고, 관련된 추론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장”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포더(Fodor)와 맨들바움(Mandelbaum) 같은 주요 표상주의자들(Fodor, 1987; Mandelbaum, 2014; Quilty-Dunn and Mandelbaum, 2018; Bendaña and Mandelbaum, 2021)은 저장이라는 생각을 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억 이론에서의 ‘장기 기억 저장소(long-term memory store)’ 개념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저장된 표상은 관련 상황에서 접근 가능하다면 관련 추론에 활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남성과 여성이 지능 차이가 있는지 질문받는다면, 당신은 남성과 여성이 지적으로 동등하다는 표상을 인출하고(retrieve), 간단한 이론적 추론을 수행한 뒤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면, 혹은 그 외 여러 조건들이 맞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면,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는 표상을 인출하고, 간단한 실천적 추론을 수행한 뒤, 맥주를 가지러 부엌으로 걸어갈 것이다.
성향주의에 따르면, P를 믿는다는 것은 P를 믿는 사람들에게 특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려는 성향을 갖는 것이다. 마음속에 실제로 저장된 표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맥주를 원할 때 냉장고로 가려는 성향이 있고, 냉장고에 맥주가 있느냐고 물으면 “네”라고 대답하려는 성향이 있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맥주가 없으면 놀라는 등의 성향이 있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저의 인지 구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고 믿는 것으로 간주된다. 성향주의는 철학적 행동주의(behaviorism)와 라일(Ryle, 1949)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최근의 성향주의자들은 행동주의와 거리를 두며, 관련 성향 중 일부가 ‘현상적’일 수 있다(즉, 의식적 경험에 관련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냉장고를 열고 맥주가 없는 것을 보았을 때 놀라움을 (단지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성향이 그러하다. 또한 다른 성향들은 ‘인지적’일 수 있다(즉, 추론이나 다른 인지적 전이와 관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집 안에 맥주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려는 성향이 그러하다(Schwitzgebel, 2002, 2021).
표상주의는 특정 유형의 인지 구조(믿는 명제의 내용과 일치하는 표상적 내용이 저장되는 구조)를 전제한다. 그러면서 저장된 내용이 어느 정도로 행동을 유도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중립적이다. 성향주의는 믿음이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기저의 구조에 대해서는 중립을 유지한다. 이 차이가 심리학 이론과 방법에 중요하다는 점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중간적인 믿음 (In-Between Believing)
표상주의에서는 믿음을 예/아니오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P는 저장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는다. 표상은 보통 ‘반쯤 저장’될 수 없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겠는가? 표상이 관련 상황에서 인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행’의 실패다. 원칙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인출될 수 있는 한, 기저의 ‘능력(competence)’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일부 표상주의자들, 특히 맨들바움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직관에 반하는 견해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개는 종이로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면, 맨들바움에 따르면 당신은 그 명제를 믿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명백히 거짓이라고 거부한 후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표상이 저장되고 당신의 인지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동시에 개가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도 믿는다.
성향주의에서 믿는다는 것은 성격 특성을 갖는 것에 더 가깝다. 즉 당신이 외향성에 특징적인 성향 프로파일(dispositional profile)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듯이, [어떤 믿음에 특징적인] 성향 프로파일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다. 때로는 거의 완벽하게 부합할 수 있다. 나는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라는 믿음에 특징적인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부합 정도가 완벽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이처럼 완벽과 거리가 먼 부합의 경우는 믿음의 중간 사례(in-between cases)로 설명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지적으로 동등하다는 믿음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그를 ‘암묵적 성차별주의자’라고 부르자)은 그 믿음에 특징적인 몇몇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남성과 여성은 지적으로 동등하다.”라고 말하며, 토론에서 그 견해를 열정적으로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성향들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 수 있다. 그는 여성이 회의에서 지적인 발언을 하면 놀랄 수 있고, 어떤 여성이 똑똑하다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경우보다 더 많은 증거를 필요로 할 수 있다.
또는 점진적 망각을 생각해 보자. 대학 시절, 나는 내 룸메이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나는 비슷한 대안들 중에서 그것을 알아보고 골라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떠올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면서,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점점 불확실해졌고, 결국에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중간 단계 동안, 나는 어떤 면에서는 그의 이름이 (이를테면) 게리케라고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반응했을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이 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간 정확한 순간은 없었다. 대신 점진적으로 희미해지는 중간적 상태의 긴 기간이 있었다.
성향주의적 견해에서는 믿음이 성격 특성과 마찬가지로 중간 사례를 허용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표상주의적 견해는 이러한 생각을 수용하는 데 더 어려움이 있다.
모순된 믿음
반대로, 표상주의적 견해는 ‘개는 종이로 만들어졌다.’ 예에서 논의했듯이 모순된 믿음을 자연스럽게 허용하는 반면, 성향주의적 견해는 모순된 믿음을 가질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P’라는 표상과 ‘P가 아니다(not-P)’라는 표상을 둘 다 저장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 지적으로 동등하다.’라는 믿음에 특징적인 성향 구조와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믿음에 특징적인 성향 구조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외향적인 사람의 성향 구조와 내향적인 사람의 성향 구조를 동시에 갖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이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암묵적 성차별주의 사례에서, 표상주의는 그 성차별주의자가 ‘여성과 남성은 지적으로 동등하다.’와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둘 다를 믿는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모순된 두 믿음은 모두 저장되어 있고 접근 가능하다(아마도 [두 믿음은] 서로 다른 인지 하위체계에 저장되어 있고,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인출될 것이다). 성향주의는 이러한 사례들을 믿음의 중간 사례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비일관적이거나 상충하는 다른 태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요일에는 유신론자이고 평일에는 무신론자인 사람,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부정하면서도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기기만적인 남편, 한 가지 방식으로 질문하면 그 길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고 말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면 동서로 뻗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문제에 대해 성향주의적 입장을 간략히 옹호해 보겠다. 우리에게 모순된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암묵적 성차별주의자에 대해 그가 ‘남성과 여성은 지적으로 동등하다.’와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를 둘 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세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 그는 평등주의자처럼 행동하고 반응하며, 다른 측면에서는 성차별주의자처럼 행동하고 반응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성향적 특성을 기술한 것이다. 필요하다면(충분한 구조적 근거(architectural grounds)가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가 모순된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상은 믿음이 아니다.
설명적 깊이 vs 설명적 피상성
퀼티-던과 맨들바움(Quilty-Dunn and Mandelbaum, 2018)은 표상주의가 인지과학의 목표와 잘 부합하는 설명적 깊이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P에 대한 믿음이 저장된 표상적 내용 ‘P’와의 관계라면, 믿음이 어떻게 행동을 야기하는지 설명할 수 있고(저장된 표상을 인출하는 것이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있는 것 사이에 왜 그토록 훌륭한 평행 관계가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으며(말하기와 믿음은 동일한 표상 저장소(pool of representations)에 접근한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들에 따르면,] 성향주의의 접근은 피상적이다. 성향적 패턴을 지적할 뿐, 그 패턴 아래에 있는 인과적 기제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설명적 깊이는 그것이 가능하다면 미덕이지만, 이 특정한 경우에는 미덕이 아니다. P에 대한 믿음이 항상, 또는 전형적으로 내적인 표상적 내용 ‘P’를 갖는 것을 수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게 봐도 경험적으로 지지되지 않는다. (시각 체계가 시야 영역에서 운동을 표상한다는, 경험적으로 잘 지지된 주장과 대조해 보라.) 최악의 경우, 이는 마음에 대한 단순한 만화적 스케치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누군가가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성을 가지려면 내적인 스위치가 ‘E’ 쪽으로 켜져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외향적 행동 패턴에 대한 내적 인과 설명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물론 사람들의 외향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적 구조가 있고, 사람들의 암묵적으로 성차별적인 행동과 맥주를 가지러 가는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적 구조도 있다. 그러나 믿음을 그러한 내적 구조에 대한 단순한 표상주의적 이해로 정의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부분적인 타협은 가능하다. P를 믿을 때마다 P의 내적 표상이 존재할 수도 있다. 성향주의자가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성격 이론가가 외향성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E 스위치를 수반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향주의자는 단지 그러한 구조로 믿음을 정의하지 않고, 그에 대해 회의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주지주의 대 실용주의
이제 두 번째 철학적 구분을 소개하겠다. 믿음에 대한 주지주의(intellectualism)에 따르면, 진심 어린 동의나 주장은 믿음에 충분하거나 거의 충분하다. 믿음에 대한 실용주의(pragmatism)에 따르면, 진정으로, 완전히 믿으려면 단지 P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주지주의/실용주의 구분은 표상주의/성향주의 구분과 교차한다(cross-cuts). 그러나 나는 가장 매력적인 형태의 성향주의는 실용주의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지적으로 동등하다고 진정으로, 완전히 믿으려면 단순히 그렇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여성이 지적인 발언을 할 때 놀라지 않아야 한다. 만나는 여성들을 같은 상황에서 남성만큼 똑똑한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자녀의 행복이 학업적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진정으로 믿으려면 그렇다고 말하려는 성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설문지의 문제점
두 가지 방법론적 함의로 결론을 맺겠다.
첫째, 실용주의적 성향주의가 맞다면,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지적으로 동등하다고 정말로 믿는가? 자녀의 행복이 학업적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정말로 믿는가? 둘 다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간적’일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삶과 관련된 광범위한 믿음과 가치들을 탐구하고자 할 때, 그들은 종종 설문지를 사용한다. 설문지는 간편하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성향주의가 맞다면, 설문지는 오도할 위험이 있다. 특히 말로 하는 동의(verbal endorsement)와 괴리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요소(lived component)를 가진 믿음이나 다른 태도에 대해 물을 때 그렇다. 설문지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알아낼 뿐, 당신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슈워츠의 축약형 가치관 설문(Short Schwartz’s Values Survey)(Lindeman and Verkasalo, 2005)은 참가자들에게 “권력(사회적 권력, 권위, 부)”을 비롯한 여러 가치들(goods)을 얻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묻는다. 주지주의가 가치관에 대해 생각하는 올바른 방식이라면, 이것은 훌륭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더 낫다면, 사람들이 이런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아는지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믿음의 발달
발달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이 다양한 인지적 이정표(cognitive milestones)에 도달하는 나이에 대해 자주 논쟁한다. 예를 들어, 사물이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 사람들이 틀린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기 같은 것에 대해서 그러하다. 표상주의가 옳다면, 각 아동이 관련된 표상적 내용을 최종적으로 저장하게 되는 특정 나이가 실제로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성향주의가 옳다면, 아마도 점진주의가 더 매력적일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믿음들은 서서히 구성되고, 관련된 여러 성향들이 관여하는데, 이러한 성향들은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불균등하고 불안정하게 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발달심리학자들은 명시적으로 물어보면 대개 점진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비판을 보면 때때로 암묵적으로 그 반대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기론자들(Boosters)”(특정 영역의 지식이 일찍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지식이 늦게 나타난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은 방법론을 과도하게 엄격하다며 거부한다. “지연론자들(Scoffers)”(특정 영역의 지식이 늦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지식이 일찍 나타난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은 방법론을 과도하게 관대하다며 거부한다. 양쪽 모두 “올바른” 나이에서 지식을 드러내는 방법만을 신뢰한다. 물론 일부 방법론은 결함이 있을 수 있지만, 점진주의적 성향주의자는 오히려 다음을 예상해야 한다. 아이가 P를 아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똑같이 좋은 여러 방법들 중에서, 일부는 다른 방법들보다 훨씬 이른 지식을 드러낼 것이라고. 어느 방법에도 결함이 없는데도 그럴 수 있다. P를 안다는 것은 ‘예/아니오’의 문제도 아니고, ‘켜짐/꺼짐’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나이도,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 집합도 있을 필요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Schwitzgebel, 1999 참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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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Keywords): 믿음(belief), 표상(representation), 설문지(questionnaires), 암묵적 편향(implicit bias), 발달심리학(developmental psychology), 철학(philosophy), 성향(dispositions), 행동주의(behaviorism)
인용 정보 (Citation): Schwitzgebel E (2022) The Nature of Belief From a Philosophical Perspective, With Theoretical and Methodological Implications for Psychology and Cognitive Science. Front. Psychol. 13:947664. doi: 10.3389/fpsyg.2022.947664
접수: 2022년 5월 19일
승인: 2022년 6월 22일
출판: 2022년 7월 26일.
편집: 뤼디거 J. 자이츠(Rüdiger J. Seitz),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뒤셀도르프 대학교(Heinrich Heine University of Düsseldorf, Germany)
심사: 디미스리오스 스타모블라시스(Dimitrios Stamovlasis),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Aristotle University of Thessaloniki,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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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신: Eric Schwitzgebel, eschwitz@ucr.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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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Frontiers in Psychology에 실린 Eric Schwitzgebel의 The Nature of Belief From a Philosophical Perspective, With Theoretical and Methodological Implications for Psychology and Cognitive Science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본을 재사용할 경우 반드시 출처를 표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