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치료인가, 아니면 단지 진리 탐구일 뿐인가? – Nigel Warburton, Jules Evans

나이젤 워버턴(Nigel Warburton): 최근 스토아 철학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특히 그 치료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어요. 저는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제 생각에 철학은 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그런 점에서 탐구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훨씬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지적했듯이 실재의 더 깊은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줄스 에반스(Jules Evans): 개인적으로 저는 모든 철학이 치료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 그리고 인도의 많은 철학자들이 철학을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죠. 그들은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실천적 기법을 개발했으며, 이를 포괄적인 ‘삶의 철학’의 일부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사고하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모든 불안정성과 역경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법들 중 일부는 이제 경험적 심리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시험되었으며, 실제로 정서적 고통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저는 이 점을 최대한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고대 철학이 실제로 사람들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철학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철학은 요즘 많이 비판받고 자금 지원이 부족한 학문이잖아요.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알릴수록 세상에서 철학의 평판도 더 좋아지고 실제 삶과의 관련성도 더 커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제가 행복(wellbeing)이 진리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의심되는데도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한다는 이유로 집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철학은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자신의 가정을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저는 그 탐구를 즐기기 때문에 스토아주의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리를 찾고 있어요. 스토아주의가 현실에 대한 모든 진리를 제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제가 계속 추구하게 하는 동기는 결국 진리는 선하며, 그것이 저에게 좋다는 일종의 플라톤적 믿음이에요. 목적지가 도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찾아 나서겠어요?

워버턴: 확실히 모든 삶의 철학들이 똑같이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고대 철학에서 발견되는 심리적 기법들을 지지하는 경험적 근거가 있다고 언급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에반스: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ural therapy, CBT)는 영국의 국립보건임상연구소(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are Excellence, NICE)의 승인을 받고 국민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에서 제공하는 몇 안 되는 대화 치료법 중 하나입니다. 이 치료법을 만들어 낸 미국의 심리치료사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와 에런 벡(Aaron Beck)은 모두 스토아 철학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CBT는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생각과 믿음에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자동적인 믿음들로부터 ‘인지적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워서 그것들을 진리가 아닌 단지 생각으로 볼 수 있다는 스토아적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CBT는 또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을 고대 철학에서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일기를 써서 습관적인 사고 패턴을 추적하고 그것에 도전하기, 격언을 사용하여 통찰을 기억하고 습관화하기, 시각화 기법을 사용하여 관점을 전환하기, 임상실습 또는 행동 ‘과제’를 통해 새로운 믿음을 습관적 행동으로 전환하기 등이 있죠.

워버턴: 그것은 고대 스토아주의로 돌아갈 것을 지지하기보다는 CBT와 같은 심리학적 기법을 사용할 것을 지지하는 논증 아닌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중요한 초기의 과학자였지만,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그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면 이는 현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에반스: 심각한 정서 장애가 있다면 당연히 CBT가 시작점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CBT는 중요한 것들을 빼놓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세네카(Seneca) 같은 사람들의 작품만큼 아름답게 쓰여 있지 않고, 아름다움에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CBT는 고대의 기법들을 도구화하고 윤리적 목표(행복, 내면의 평화, 덕, 정의 등)에 대한 어떤 생각도 배제합니다. 셋째, CBT는 윤리학과 물리학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이에 대해 답을 찾으려 했으며, 적어도 이것이 중요한 질문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넷째, CBT는 8주에서 16주 정도의 단기 치료 프로그램으로 설계되었고,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철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치료사가 우울증이나 불안을 치료하기 위해 윤리적 철학을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죠. 그들은 기본적인 자기 변화 기법을 제공할 뿐이며, 더 넓은 삶의 철학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워버턴: 이 모든 것은 결국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겠죠. 저는 철학을 우리가 무엇이고 세계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활동으로 봅니다. 긴 역사와 풍부한 전통을 가진 활동이죠. 철학은 사물의 본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철학은 독단을 거부하고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통해 번성합니다. 어떤 진지한 철학도 철학자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 변화가 더 나아지거나 위안이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논점을 선취하는 것(begging the question)이죠. 철학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더 정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어떤 종류의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자기기만의 큰 위험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완벽한 논리는 당신을 매우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을 어떻게 보시나요?

에반스: 저는 철학에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합니다. 저는 가치관과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천해보고 내가 그것대로 살 수 있는지, 그것이 현실에 맞는지, 그것이 더 풍요로운 삶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현실(다른 사람들을 포함해서)이 제게 피드백을 주어서 제가 지혜롭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죠. 이러한 양방향 과정은 늘 변화하며, 당신은 가정들을 조정하고 재검토하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도 완전히 반독단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가치관과 의견을 가져야 하죠. 당신도 그런 게 있지 않나요?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피론(Pyrrho)처럼 완전한 회의주의자라면 침대에서 나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을 겁니다.

워버턴: 네, 물론 우리는 어떤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믿음은 다른 것들보다 더 단단히 뿌리박혀 있을 뿐이죠. 저는 생각과 실제 경험 사이의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을 추구한다는 당신의 생각이 마음에 듭니다. 이런 접근 방식의 결과로 당신은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시나요?

에반스: 저는 겸손, 친절, 경외심, 창의성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가치들을 얼마나 형편없이 실천하고 있는지 아신다면 저를 비웃으실 거예요. 당신은 어떤가요?

워버턴: 저는 버트런드 러셀이 1959년에 BBC에서 전한 미래에 보내는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가치를 두 가지 원칙으로 요약했죠. 첫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우리가 진실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만을 보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죠. 둘째, 이것도 실천하기 어려운 원칙인데, ‘사랑은 지혜롭고, 증오는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심지어 혐오하는 것들을 말할 것이라는 사실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용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처럼 저도 분명 많은 경우 이런 가치들을 실천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좋은 원칙들입니다.



원글에 달린 저자들의 댓글

나이젤 워버턴 (2015년 5월 21일)

철학은 탐구입니다. 세계에 대한 경이감이 이러한 탐구의 원동력이 되어 추측, 추론, 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그를 통해 항상 현실에 대한 더 정확하고 더 흥미로운 관점을 얻으려는, 또는 적어도 그런 관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도 발견하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며, 그것을 아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스스로 구루로 자처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아는 것(또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과 같은 한 가지 전형적인 목표를 예로 들자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치료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으며, 우울증이나 행동의 마비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치료와는 거리가 멀게도, 자신의 실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과정은 자기 개선이 아닌 자기 파괴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치료를 제공한 철학자들로 돋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각 개인은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책임이 있으며,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인생의 부침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연습과 신념을 바꾸는 실천적 연습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종의 초기 인지행동치료(CBT)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은 분노와 같은 일부 감정들은 완전히 억제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현대에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거의 컬트적인 유행이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이를 모든 정신적 질병에 대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제시합니다. 아마도 스토아 철학은 좋은 치료를 제공하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그것이 좋은 철학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간이 처한 조건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시도하는 철학이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행 중인 탐구의 결과를 미리 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통찰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철학사를 들춰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철학을 일종의 지적 뷔페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철학자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심지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정신(psyche)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실재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탐구할 때, 우리의 질문이 어디로 가게 될지, 혹은 그 추구 자체가 우리에게 좋을지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줄스 에반스 (2016년 1월 18일)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철학이 치료적이며 풍요로운 삶이나 더 나은 삶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나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법을 가르친다”)부터 에피쿠로스, 디오게네스,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보에티우스, 여러 중세 신비주의자들, 에라스무스, 데카르트, 샤프츠베리(Shaftesbury), 칸트, 흄, 볼테르, 밀, 벤담, 러셀(『행복의 정복』),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들은 모두 철학이 삶을 더 낫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니체조차도 그의 철학이 받아들여진다면 한 사람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철학이 정치 공동체를 개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정치 철학자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마르크스 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의 요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 놀라운 목적 상실이 나타난 것은 현대 철학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결과 철학은 우리 문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분석 철학 바깥의 일반인들은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최고의 고대 철학자들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답변들이 우리 교육 체계에서 더 많이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이젤 워버턴 (2016년 1월 19일)

당신이 언급한 철학자들 중 일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심연을 응시하는 것을 피함으로써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치료 개념은 당신의 것과 매우 달랐으며 단지 비유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병에 갇힌 파리에게 출구를 ‘보여 주어’ 빠져나가게 하는 것처럼, 그의 경우 철학은 언어에 의해 마법에 걸린 상태를 풀어주는 한에서만 치료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그것을 심리적 건강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평생을 철학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모두 정신적 안정의 모델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흄이 철학하는 것이 치료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회의적인 철학적 고민에 대항하고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카드놀이나 백개먼(Backgammon: 보드게임)을 즐겨야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신이 언급한 정치철학 및 도덕 철학자들이 모두 이성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치료를 제공함으로써는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바꾸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도 양립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철학이 치료적 역할을 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과는 약간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소개

나이젤 워버턴(Nigel Warburton)은 작가, 철학자, 팟캐스트 진행자이다. 그의 가장 최근 저서는 A Little History of Philosophy (2011)(번역본: 정미화 역, 『철학의 역사: 소크라테스부터 피터 싱어까지』, 소소의책, 2019)이다.

줄스 에반스(Jules Evans)는 런던 퀸 메리 대학교(Queen Mary University) 감정 역사 센터(the Centre for the History of the Emotions)의 명예 연구원이다. 그는 팀 리드(Tim Read)와 함께 Breaking Open: Finding a Way Through Spiritual Emergency (2020)의 공동 편집자이다.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Is philosophy therapy, or is it simply a search for truth?를 번역한 것입니다.
Aeon의 번역 및 배포 기준을 준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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