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은 정치, 시사, 종교, 사회, 도덕, 스포츠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대화나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이런 견해들을 표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그것이 도전받으면 불쾌해한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분명한 대답은 우리가 표현하는 견해를 실제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즉, 그것들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것들을 믿기를 원한다. 우리는 진리가 승리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고 있을까? 당신은 주장할 때 항상 진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은 이상하게 들리거나, 심지어 기분 나쁘게 느껴질 수 있다. 내가 당신이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거나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의식적으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빠르고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들 (‘시스템 1’ 과정이라고도 부른다)이 우리 행동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런 과정들은 억압된 기억이나 욕망과 관련된 프로이트식의 과정이 아니라, 의식적 자각 없이 작동하는 평범한 일상적 판단과 동기, 감정들이다. 마치 정신의 자동 조종 장치 같은 것이다.
이런 과정들이 우리가 하는 말의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실제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말들이 그냥 입으로 나올 뿐이다. 하지만 우리 말 뒤에 있는 동기가 무의식적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그 동기를 추측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잘못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혁명적인 발상은 아니다. 수세기 동안 극작가들과 소설가들은 자신의 동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들을 묘사해 왔다. (자기 지식의 본질과 한계에 대해서는 필자의 이전 Aeon 글(번역본)을 참조하라.)
우리가 실제로는 믿지도 않는 견해를 표현하게 만드는 동기들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참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도 있다(증거가 없는데도 실종된 자녀가 살아있다고 고집하는 부모들을 생각해 보라). 존경하는 사람들과 결부된 견해여서,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서 그것을 주장할 수도 있다(유명인들의 의견에 영향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관심을 받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자극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십대들을 생각해 보라). 주변과 잘 어울리고 사회적 승인을 얻기 위해서 그런 견해를 내세울 수도 있다(보수적 배경을 가진 대학생을 생각해 보라). 아니면 어떤 신조나 이념에 대한 자신의 헌신(commitment) 때문에 그것을 변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다(우리는 때때로 이런 태도를 신앙(종교적 의미에서의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동기들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한번 견해를 표현하고 나면, 우리는 (역시 무의식적으로) 이제 그것에 구속되어(committed) 있다고 느끼며, 성실성(integrity)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그 견해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갖게 될 수 있는데, 이는 스포츠 팀에 대한 애착과 비슷하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견해가 되었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이므로, 단지 우리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경쟁하는 견해들을 이기기를 바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주장에 대해 강한 개인적 열심(commitment)을 갖게 될 수 있다. 실제로는 그것을 믿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우리가 진리와 지식에 대한 관심(철학자들이 인식적 관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감정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그들의 견해를 그렇게 격렬하게 방어하고, 그들의 견해가 도전받을 때 그토록 상처받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가끔 믿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게 나쁜 일일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언급한 목적들, 예를 들어 사회적 수용을 추구하거나 자기 이미지(self-image)를 기르는 것 등은 반드시 나쁜 것들은 아니며, 게다가 그것들은 무의식적이므로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청중을 확신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단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인상을 주는 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이 스스로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 것일 때(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부모들처럼), 우리는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으며, 우리가 말하는 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말한 것과 행한 것 사이에 명백한 불일치가 있다면, 우리의 불성실함(insincerity)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수용, 인정, 위안에 대한 무의식적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된 근거도 없는 주장들에 기초하여 선택하게 만들 수 있으며, 그 결과 좌절하거나 실패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주장을 정말로 믿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의식적 성찰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주장을 의식적으로 떠올렸을 때,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조차 믿을 만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이론가들은 의식적 사고가 단순히 속으로 자신에게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제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동기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언급했듯이, 무의식적 욕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속이게 만들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떤 주장을 실제로는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참이라고 자신에게 말하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고 실험이 우리가 진정으로 참이라고 믿는 것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는 진리가 정말로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위안을 주는 견해를 유지하거나 소중한 이념이나 자아상을 지키는 것이 진리보다 우리에게 거의 항상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진리 탐지 악령(Truth Demon)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주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틀린 답을 하거나 전혀 답하지 못할 경우 끔찍하게 처벌할 매우 강력한 존재 말이다. 만약 악령이 어떤 주장이 참인지 물을 때 당신이 계속 그 주장을 고수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이며, 그것이 참이라고 정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는 악령의 고문 위협 앞에서 다른 답을 한다면, 당신은 그 주장을 정말로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을 테스트하는 실용적 방법을 제공한다. 방금 묘사한 상황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상상하고, 당신의 어떤 견해에 대해서든 무엇을 말할 것인지 확인해 보라. 다만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키쓰 프랭키시(Keith Frankish)는 철학자이자 작가다. 그는 셰필드 대학교(the University of Sheffield) 철학과의 명예 독서가(honorary reader)이며, 오픈 유니버시티(the Open University)의 방문 연구원이고, 크레타 대학교(he University of Crete)의 뇌와 마음 프로그램의 겸임 교수이다.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What do you really believe? Take the Truth-Demon Test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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