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건강하며, 하루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대형 TV 앞에서 한두 시간 정도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만큼 시간도 있다. 어느 날 밤 당신은 태양 에너지 다큐멘터리를 틀어 놓고 와인을 홀짝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기후 변화에 관한 내용을 우연히 듣는다. 최근의 온실가스 배출량 수치에 관한 이야기다. 바로 그날 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당신의 친구는 두 번째 직장에 막 출근한 상황이어서 그 다큐멘터리를 볼 수 없었고 편히 쉬지도 못했다. 며칠 후 당신과 친구가 만나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최근의 온실가스 배출량 수치를 모른다고 해서 당신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예시가 보여주는 것은 진실(truth)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노력이나 성품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극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탐구 분야들을 금지하는 종교 공동체나 사회 환경에서 자란다. 언어 장벽, 교통, 돈, 질병, 기술 접근성, 불운 등으로 제약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다양한 이유들은 진실에 다가가기 훨씬 어렵게 만든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떤 문제에 관한 진실이 마치 호텔 베개 위에 놓인 민트처럼 쉽게 주어진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저 이런 단순한 진실을 안다는 것만으로 우월감을 느낀다면, 이는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과 노력 없이도 지식을 얻게 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온갖 불리한 조건에 맞서 끝없이 노력해도 여전히 얻지 못하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안다(그리고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라는 말을 겸손함 없이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런 지식 습득과 관련된 엄청난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정말로 중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간과한 채 배제를 위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지식과 건강한 관계를 맺게 해주는 다양한 성품상의 특성들(character traits)을 통해 드러난다. 철학자들은 이런 특성들을 인식적 덕목(epistemic virtues)이라 부른다. 우리는 우연히 어떤 지식을 갖게 된 사람들을 칭찬할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칭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기준만이 진리(truth)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겸손(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자세), 지적 용기(불편한 진실이라도 추구하는 마음), 열린 마음(선입견을 억제하고 논증의 모든 면을 검토하는 것), 호기심(계속해서 탐구하려는 자세) 같은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자신을 바로잡을 준비가 되어 있고,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 용감하며, 숙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갖고, 깊은 호기심에 이끌리는 사람은 때로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무심히 가끔 은쟁반에 올려진 진실을 건네받는 사람에 비해 진리와 더 나은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점에서, ‘아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알기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이 질문에는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질문의 첫 번째 부분)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지식이 어떻게 습득되었는지 알고 싶다. 즉, 그 지식이 소유자의 무관심과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부지런한 탐구를 통해 얻어진 것인지 말이다. 후자라면 아는 것이 더 낫다. 이 경우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이 첫 번째 부분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지식의 소유와 그것을 추구하는 태도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통해 이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켜 보자.
물고기를 갖는 것과 물고기 잡는 법을 아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을까? 여기서도 우리는 좀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물고기를 갖게 된 것이 물고기 잡는 법을 아는 것의 결과라면, 다시 한 번 두 선택지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으며, 이런 결합이야말로 이상적이다. 하지만 물고기를 갖게 된 것이 누군가가 물고기를 줄 때까지 기다린 결과라면, 스스로 잡는 법을 아는 것이 더 낫다. 기다리는 사람은 운이나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강으로 가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낚싯줄을 물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아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 걸맞은 태도가 함께할 때만 그렇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식의 소유가 (흔히 그렇듯이) 주로 산발적인 운이나 특권에 의존한다면, 그 사람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을 뿐 아니라 근거 없는 자만심에 빠질 위험이 있다(자만심 자체가 수반하는 복잡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따라서 만약 두 개의 완전히 분리된 범주로 나뉜다면, 우리는 아는 것보다 알기를 추구하는 것을 선호해야 한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처럼,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으로 나가서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성과, 즉 얻어낸 지식에 만족할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강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지식 탐구의] 과정을 반복할 수도 있다.
사람은 결국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심지어 물리적으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어떤 충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파국적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일관된 자세는 우리가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칭찬하고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조니 로빈슨(Jonny Robinson)은 맥쿼리대학교(Macquarie University) 철학과에서 튜터이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시드니에 거주한다.
이 글은 Aeon에 게재된 Would you rather have a fish or know how to fish?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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